항목 ID | GC0820116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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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長丞-- 長丞祭 |
이칭/별칭 | 노량진 장승제 |
분야 | 생활·민속/민속,문화유산/무형 유산 |
유형 | 의례/제 |
지역 | 서울특별시 동작구 장승백이로 94[노량진동 310-118] 동작도서관 앞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유선영 |
[정의]
서울특별시 동작구 노량진2동 주민들이 대방장승에 지내는 신앙의례.
[개설]
노량진동과 상도동, 대방동이 인접한 장승배기역 동작도서관 근처에 장승이 세워져 있는데, ‘상도동 장승백이’, ‘대방장승’이라 불린다. 이 장승의 위치가 행정구역상으로는 노량진2동에 속해 노량진2동 바르게살기위원회에서 장승제를 주관하고 있다. 마을주민들이 노량진 장승제의 중요성을 인식하여 1991년 10월 24일 노량진 장승제를 개최한 이후 매년 장승제를 지내오고 있다. 제일(祭日)은 10월 24일로 고정되어 있으며 낮 12시에 지낸다. 노량진 장승제의 유래에서도 나오는 바 장승백이는 정조가 돈화문에서 출발하여 수원 현륭원(顯隆園)까지 가는 왕의 행행로(行幸路)에 위치하고 있었다. 이 길은 장승백이~대방동~시흥~안양~의왕을 거쳐 수원에 이르는 도로로 시흥로라 한다. 시흥로는 정조가 왕의 행행로로 새로이 개발한 도로이다. 정조가 시흥로를 새로 만들기 전에는 도성에서 화성까지 가는 경로가 한강을 도강하여 과천을 통해 가는 과천로가 유일하였다. 그러나 과천로는 길이 험준하여 지대가 평탄하고 넓은 시흥로를 개발하게 되었다.
[연원 및 변천]
장승배기에 장승이 건립된 것은 18세기 말 정조의 능행길과 관련이 있다는 구전이 전한다. 정조가 왕위에 오른 후 아버지 사도세자의 묘소인 현륭원(顯隆園)에 참배를 다니던 길목으로 어가가 쉬어가던 곳이다. 조선 시대 장승백이는 산림이 울창하여 근처에 인가도 없고 통행이 드문 곳이라 잠시 쉬기에도 적적한 곳이었다. 이에 정조는 장사(壯士) 모양의 남녀 장승을 만들고 천하대장군과 지하여장군이라 이름하도록 하였다. 이에 어명으로 이곳에는 큰 장승 두 기를 마련하였고 정조는 참배길에 이곳에서 쉬곤 하여 ‘장승백이’라는 지명이 생겨나게 되었다는 것이다. 1930년대 일본인들이 미신 타파라는 명목으로 없앤 것을 주민들이 복원하여 1991년부터 매년 장승제를 지내고 있다. 2015년 서울미래유산으로 선정되었다.
[신당/신체의 형태]
노량진 장승은 현재 지하철 장승배기역 근처에 세워져 있는데, 이곳은 조선 시대 노량진 선창으로 가는 길목이었고, 장승의 형상은 사람의 얼굴로 두 기가 마주 서 있었으며, 한쪽에는 ‘천하대장군(天下大將軍)’, 다른 한쪽에는 ‘지하여장군(地下女將軍)’이라 새겨져 있었다. 현재 장승배기의 장승은 옛 장승이 있던 자리에 새로 만들어 세웠는데, 조선 시대에 만들어진 원래 장승은 일제 강점기에 일본인들이 없애버렸고, 주민들이 주도하여 1991년 새로 제작한 것이다. 2012년 '제22회 장승배기 장승제'를 앞두고 노량진2동 바르게살기위원회 회장 박장규가 주도하여 새로 장승을 교체하면서 문구를 ‘천하대장군(天下大將軍)’과 ‘지하대장군(地下大將軍)’으로 고쳐 표기하였다. 이에 대해 박장대는 장승은 남녀로 대별되는 것이 아니고 하늘과 땅을 다스리는 대장군이기 때문에 수정한 것이며 특히, 노량진 장승은 장승의 우두머리인 대방장승이기 때문에 이를 바로잡았다고 하였다.
[절차]
노량진 장승제는 유교식 제례로 진행된다. 행사의 주축이며 제례를 주관하는 것은 제관이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바르게살기운동협의회 회장이 제관을 맡았으나 바르게살기운동협의회만의 행사가 아니라 마을 전체의 행사임을 강조하고 주민들의 참여를 유도하기 위해 주민자치위원장을 비롯한 노량진2동의 13개 기관장이 모두 제관으로 참여하고 있다. 제관은 모두 도포를 입는다. 축문은 예전부터 마을 어르신이 작성해 둔 축문이 있어 새로 축문을 작성하지 않고 그대로 축원한다. 제수는 팥시루떡, 돼지머리, 생쌀, 과일, 막걸리, 대구포를 올리고 제례가 끝나면 제관이 마을의 합동 소지를 올리는 것으로 제의가 끝난다. 노량진 장승제는 마을의 안녕을 기원하고 주민들이 단합하기 위한 소중한 전통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