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320023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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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德泉里 |
영어음역 | Deokcheon-ri |
분야 | 지리/인문 지리 |
유형 | 지명/행정 지명과 마을 |
지역 | 경상북도 김천시 봉산면 덕천리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송기동 |
[정의]
경상북도 김천시 봉산면에 속하는 법정리.
[형성 및 변천]
조선 말 충청북도 황간군 남면에 속했던 지역으로 1914년 남전(藍田)·도산(道山)이 통합되어 김천군 봉산면 덕천동으로 개편되었고, 1949년 금릉군 봉산면 덕천동이 되었다. 1971년 용배(龍背)가 덕천1동, 남전·도산이 덕천2동으로 분동되었다. 1988년 동(洞)을 리로 바꾸어 덕천리가 되었고, 1995년 김천시 봉산면 덕천리가 되었다.
[자연 환경]
용배는 가막산을 등지고 패화천 변에 자리 잡은 평야 지대로 들이 넓고 토질이 비옥하여 예부터 벼농사를 많이 지었다. 남전과 도산은 국도 4호선 변에 자리 잡아 교통이 편리하다.
[현황]
덕천리는 2010년 11월 30일 기준 면적은 2.94㎢이며, 2015년 12월 31일 현재 인구는 총 279세대에 627명(남자 308명, 여자 319명)의 주민이 살고 있다. 덕천1리·덕천2리 두 개 행정리로 이루어졌으며 자연 마을로는 용배·도산·남전이 있다. 과거에는 벼농사와 채소를 주로 재배했으나 지금은 김천 최대의 시설 포도 재배 단지로 변모했다. 문화 유적으로는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250호인 금릉 덕천리 석조관음보살입상이 있다. 금릉 덕천리 석조관음보살입상은 원래 길가에 방치되어 있었는데 1950년대 김명화라는 신도가 용화사를 지어 봉안하였다.
용배는 조선 중기에 개척한 마을로 마을을 지나던 한 선비가 주변 산세가 용의 등과 같다고 하여 붙인 이름이다. 마을의 풍수적인 형상과 관련하여 마을이 용의 등 부분에 해당해서인지 마을에 샘을 파면 예부터 마을에 해악이 미치고 물이 뒤집혀 황토물이 나와서 우물을 파지 않고 1950년대까지 직지천 물을 식수로 사용했다고 한다.
마을에서 경부고속국도 굴다리를 지나자마자 오른쪽으로 작은 저수지인 황울산못이 있는데 황울산이라는 사람의 집터를 헐어서 못을 팠다고 알려져 있다. 황울산은 예지2리 내입석에서 정씨 집안과 묏자리 다툼에서 명당을 빼앗기게 되자 정씨 집안의 비를 두 동강냈다는 전설의 주인공이다. 이후 황씨 집안은 가세가 기울고 황울산의 집터는 못이 되었다고 한다.
덕천1리에서 태화3리로 넘어가는 낙고개[落峴]는 예부터 명당으로 소문이 나서 서울로 과거 보러 가는 선비들이 주로 넘던 고개였다. 임진왜란 때 명나라 장수 이여송이 명당의 맥을 끊었다는 소문이 퍼지면서 이 고개를 넘은 과거 응시자들 중 낙방한 이가 속출했고 이후부터 현재의 국도 방면으로 돌아가게 되어 고개 이름도 낙고개가 되었다고 한다. 이후 경부고속국도가 낙고개를 관통하고 그 옆으로 지방도가 나면서 고개가 잘려 옛 고개의 흔적은 찾을 길이 없다.
남전과 도산은 1600년경 나주 임씨 임재한(林載漢)이 처음 들어와 마을을 이루었다. 두 마을은 원래 덕천우체국 인근을 경계로 옛 검문소 방면과 길 건너 직지농협 일대까지의 남전과, 덕천우체국에서 시내 방면으로 이어진 도산으로 구분되는 별개의 마을이었는데 차츰 두 마을 중간에 집이 들어서면서 지금은 마을 구분이 없어진 상태이다.
남전은 일대의 드넓은 밭에서 채소가 많이 생산되어 붙인 이름이다. 일대 드넓은 들판은 수량이 풍부하고 토질이 비옥하여 예부터 봄 무가 많이 생산되어 김천과 황간에 무를 조달하고도 남는다 하여 생계들, 어느 곳을 파도 맑은 물이 솟는다 해서 천포(泉布)라고도 불리었다. 도산은 마을 중앙에 있는 야산인 도산에서 따 온 이름이다. 매년 음력 1월 14일 저녁 주민들이 모여 마을의 안녕을 기원하는 동제(洞祭)를 지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