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320024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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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武安里 |
영어음역 | Muan-ri |
분야 | 지리/인문 지리 |
유형 | 지명/행정 지명과 마을 |
지역 | 경상북도 김천시 감천면 무안리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배순분 |
[정의]
경상북도 김천시 감천면에 속하는 법정리.
[명칭 유래]
1914년 행정 구역 개편 때 무릉(武陵)의 ‘무(武)’자와 신안(新安)의 ‘안(安)’자를 따서 무안(武安)이라 하였다.
[형성 및 변천]
조선 말 성주군 신곡면에 속했던 지역으로 1914년 삼거리(三巨里)·외안·기산(箕山)·무릉·신안·통정(桶井)·대동(大洞)이 통합되어 김천군 감천면 무안동으로 개편되었다. 1949년 무안1동·무안2동·무안3동으로 분동되었고, 금릉군 감천면 무안동이 되었다. 1988년 동(洞)을 리로 바꾸어 무안리가 되었고, 1995년 김천시 감천면 무안리가 되었다.
[자연 환경]
남쪽에 고당산이 솟아 있고 북쪽으로 무안천이 흐른다.
[현황]
무안리는 감천면에서 가장 면적이 넓은 마을로 감천면 소재지에서 3㎞~6㎞ 거리에 넓게 분포되어 있다. 2010년 11월 30일 기준 면적은 9.13㎢이며, 2015년 12월 31일 현재 인구는 총 170세대에 379명(남자 196명, 여자 183명)의 주민이 살고 있다. 동쪽으로 농소면 봉곡리, 서쪽으로 용호리, 남쪽으로 고당산을 사이에 두고 조마면 신왕리, 북쪽으로 무안천을 사이에 두고 광기리와 이웃하고 있다. 무안1리·무안2리·무안3리 세 개 행정리로 이루어졌으며, 해주 오씨·경주 최씨·김녕 김씨·밀양 박씨 집성촌이다.
교통이 매우 불편한 마을이었으나 조마면에서 농소면으로 연결되는 지방도 59호선이 새로 개통되면서 교통이 매우 편리해졌다. 무안천 일대에 좁지만 비옥한 토지가 형성되어 사과, 자두, 참외 등 과수와 시설 재배가 확대되고 있다.
자연 마을로는 기산·외안·삼거리·무릉·신안·통샘말·대동 등이 있다. 기산은 마을이 형성될 때 마을의 터를 먼저 잡은 곳이라 하여 ‘터 기(基)’자를 써서 붙인 이름이다. 뒤에 1700년경 경주 최씨 일가가 입향해 마을 주위를 에워싸고 있는 산세가 소쿠리, 즉 곡식을 고르는 키처럼 생겼다고 하여 ‘터 기’자를 ‘키 기(箕)’자로 고쳐 기산(箕山)이라 하였다. 대대로 파평 윤씨와 해주 오씨 일가가 살아오다가 점차 사람들이 아랫마을인 외안이나 다른 곳으로 떠났다.
외안은 무안리의 본동에 해당하는 마을이다. 원래 성주 벽진에서 기산으로 들어와 살던 해주 오씨 오태원(吳泰元)이 1705년 기산 앞쪽인 현재의 외안으로 옮기면서 마을이 새로 형성되었다. 외안으로 마을을 이전한 사연과 관련하여 재미있는 이야기가 전해 온다. 풍수지리상 외안 뒷산은 소가 혀를 길게 빼고 편안하게 누워 있는 명당으로 알려져 왔는데 이를 알아보고 이 터로 옮겨 마을을 이루었다고 한다. 실제로 마을 앞 들판 지명은 소 먹이통을 뜻하는 구시들이고, 소머리에 해당하는 지점에 소 혓바닥을 뜻하는 쇠빠진바위가 있어 신빙성을 더하고 있다.
마을 뒤로는 고당산을 배후로 해주 오씨 재실인 후원재(厚遠齋)가 있다. 고당산에 있는 여러 골짜기 중 불당골과 개밥골이라는 지명이 유독 특이하다. 옛날 절이 있던 자리에 석탑만이 남아 있어 불당골 또는 탑골이라 하였는데 이 탑에 공을 들이면 효험이 있다는 소문이 퍼지면서 원근 각지에서 많은 사람들이 찾아왔으나 언제부터인가 탑도 사라졌다고 한다.
불당골 옆 개밥골 또는 개가죽골로 불리는 골짜기는 옛날 가족같이 주인을 따르던 개가 주인을 따라 밭에 왔다가 갑자기 죽자 이를 안타깝게 여긴 주인이 밭에 묻어 준 후부터 개가 죽은 골짜기라는 뜻에서 붙인 이름이다. 삼거리는 6·25전쟁 뒤 난민들을 정착시키고자 무안천 변에 임시로 만든 작은 마을이다. 무안1리~무안3리 갈림길에 자리 잡아서 붙인 이름이다. 삼거리에는 칠성방구라 불리는 거대한 바위가 있어 인근 주민들이 소원을 비는 제단으로 이용하다가 어느 해인가 공사 중에 바위가 여러 갈래로 깨어지고 땅에 묻혀 지금은 흔적만 남았다.
무릉은 1730년대 동래 정씨 정한필(鄭漢弼)이 칠곡에서 이거해 마을을 이룬 후 대대로 동래 정씨 집성촌을 이루어 왔다. 고당산 자락 무안천 변에 자리 잡아 주변 경치가 아름답고 살기 좋은 마을이어서 무릉도원(武陵桃源)에 비유해 붙인 이름이다. 달리 섶반, 섶바이라고도 한다.
마을 입구에는 김녕 김씨 효행비와 정려각이 있다. 김씨 부인은 무릉에 살던 정수인(鄭壽麟)[1859~?]에게 출가해 시부모를 극진히 봉양하였고, 시아버지가 세상을 떠나자 3년 동안 매일같이 산소를 찾아 곡(哭)을 하여 무릎을 꿇은 자리에 구덩이가 파이고 오랫동안 풀이 자라지 않아 하늘이 낸 효부라고 칭송이 자자했다. 이에 지역 유림들의 청원으로 조정에서 정려를 내렸다.
신안은 무릉에서 농소면으로 이어지는 도로를 따라 1㎞ 남짓 더 가면 왼쪽에 자리 잡고 있다. 1840년경 전주 이씨 일가가 들어와 새로 마을을 형성하면서 평안함을 기원했다 하여 붙인 이름이다. 1856년 해주 오씨 일가가 들어와 웅장한 재실(齋室)을 세웠다 하여 재실마라고도 한다. 현재 마을 입구 축사 일대에 있던 재실은 원인 모를 화재로 불타고 지금은 담장 축대 일부와 우물터가 남아 있다.
통샘말은 무릉에서 삼거리 방면으로 산 너머에 자리 잡고 있다. 마을에 큰 샘이 있어 붙인 이름이다. 달리 통샘, 통정이라고도 한다. 물맛이 좋기로 유명해 원근 각지에서 온 인파로 넘쳐 났던 옛 우물은 언제부터인가 메어져 논으로 변해 흔적을 찾을 길이 없다.
대동은 인근에서 손꼽히는 큰 마을이어서 붙인 이름이다. 달리 큰골이라고도 한다. 1500년경 군위 방씨(軍威方氏) 방광로(方光老)가 처음 들어와 살기 시작한 이래 1560년경 밀양 손씨, 1616년 은진 송씨 일가가 들어와 본격적으로 마을이 크게 이루어졌다. 대동의 군위 방씨는 김천에서 유일하게 세거하는 성씨이다. 마을 뒷산에는 후손이 크게 발복(發福)한다고 전해지는 죽산 박씨 집안의 선산이 있다. 조선 숙종 때 이 명당을 둘러싸고 현감 출신의 한 권력가와 죽산 박씨 집안의 두 자매 사이에 얽힌 기막힌 묘지 쟁탈전이 벌어진 현장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