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3200248 |
---|---|
한자 | 光基里 |
영어음역 | Gwanggi-ri |
분야 | 지리/인문 지리 |
유형 | 지명/행정 지명과 마을 |
지역 | 경상북도 김천시 감천면 광기리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배순분 |
[정의]
경상북도 김천시 감천면에 속하는 법정리.
[명칭 유래]
광암(廣岩)의 ‘광(廣)’자와 기동(基洞)의 ‘기(基)’자를 따서 광기(廣基)라 하였다. 뒤에 광기(光基)로 바뀌었다.
[형성 및 변천]
조선 말 성주군 신곡면에 속했던 지역으로 1914년 기동·접화리(蝶花里)·광암·등당(登堂)·내동(內洞)이 통합되어 김천군 감천면 광기동으로 개편되었다. 1949년 광기1동·광기2동·광기3동으로 분동되었고, 금릉군 감천면 광기동이 되었다. 1988년 동(洞)을 리로 바꾸어 광기리가 되었고, 1995년 김천시 감천면 광기리가 되었다.
[자연 환경]
자연 마을 기동 주변으로 접청산(蝶靑山)·은척산(銀尺山)·와우산(臥牛山)이 둥글게 마을을 에워싸고 김천 시내 방향으로 트여 있다. 이 같은 지세는 이른바 소쿠리형 명당으로 꼽히는데, 특히 은척산과 와우산 사이에서 마을 중심으로 흘러내린 야산인 고꾸랑재가 마을회관까지 연결되어 소쿠리로 곡식을 끌어당기는 밀개의 형국을 하고 있어 재물이 모였다가 쉽게 빠져나간다는 소쿠리형 명당의 약점을 완벽하게 보완해 주고 있어 흥미롭다.
내동은 농소면 봉곡리와 경계를 이루는 대밭골 뒷산에서 발원한 새들내가 마을을 감싸고 흐르다 감천으로 흘러들고 북쪽으로 매봉산이 가로막고 있다. 여러 산으로 둘러싸인 분지 지형이어서 금송리 대방으로 이어지는 매봉재, 무안리 대동으로 이어지는 성주넘이재, 도평리로 이어지는 갈말재 등 고개가 발달하였다. 일설에는 마을 입구가 좁고 골이 깊어 입구에서는 내부가 보이지 않아 임진왜란 때나 6·25전쟁 때 피난처로 각광받았다고 한다.
[현황]
광기리는 감천면 소재지로 2010년 11월 30일 기준 면적은 5.43㎢이며, 2015년 12월 31일 현재 인구는 총 272세대에 623명(남자 327명, 여자 296명)의 주민이 살고 있다. 광기1리·광기2리·광기3리 세 개 행정리로 이루어졌으며 성주 이씨·인천 이씨·김해 김씨 집성촌이다 과거에는 벼농사를 주업으로 하였으나 수년 전부터 참외를 중심으로 한 시설 농사를 중점적으로 재배해 높은 소득을 올리고 있다.
자연 마을로는 기동·접화리·내동·등당·광암 등이 있다. 기동은 1860년경 성주 이씨 15세손인 충장공파 이원확(李元確)이 인근의 도평1리 시영골에서 이주해 정착한 이래 대대로 성주 이씨 집성촌을 이루고 있다. 성주 이씨 일가가 이주하면서 소쿠리와 밀개의 지형이 어우러진 완벽한 마을 터의 기본을 갖추었다 하여 기동 또는 터골이라 하였다. 기동 아래로는 구만리들이 드넓게 펼쳐져 있다. 과거에는 밤나무 숲이 우거져 봄이면 밤꽃이 흐드러지게 피어 장관을 이루었는데 지금은 새하얀 비닐하우스 꽃이 옛 밤꽃을 대신하고 있다.
접화리는 기동 조금 위쪽으로 인접해 있는 마을이다. 마을 일대가 과거에 수풀이 우거진 야산이라 인근의 처녀 총각들이 모여들어 소에게 풀을 먹이고 놀이를 하던 장소이다 보니 남녀 간의 애정 행각이 빈번해 이를 나비와 꽃이 만나는 것에 비유하여 붙인 이름이다. 이 같은 설에 대해 각종 자료와 마을 원로들의 의견을 종합해 본 결과 남녀 간의 애정 행각 운운은 다분히 와전된 것으로 보이며 다만 기동과 적송골에서 분가해 당시 접청산 자락 더푸리재에 새로 마을을 이루면서 더푸리를 한자로 굳이 옮겨 적는 과정에서 음이 비슷한 접화리로 한 것으로 여겨진다.
접화리 뒤 적송이 무성하여 적송골로 불린 작은 마을은 폐동이 되었고 일제 강점기에 적송 보호림으로 지정받았다는 옛 골짜기는 잡목만 무성할 따름이다. 등당은 1590년대 말 인천 이씨 이송(李松)이 임진왜란 때 피난 와서 정착한 이래 대대로 인천 이씨 집성촌을 이루었고, 1800년대 중반 김해 김씨 김종성(金鍾聲)이 조마면 도암에서 이주해 정착하면서 김해 김씨 집성촌을 이루었다. 산을 올라와 집을 지었다 하여 ‘오를 등(登)’자와 ‘집 당(堂)’자를 써서 붙인 이름이다. 일설에는 뒷산에서 마을을 내려다보면 주변 산에 둘러싸인 마을의 형세가 등잔처럼 오목하게 생겨서 등당(燈堂)이라 했다고도 한다. 언제부터인가 마을 안쪽의 내동과 구별하여 큰마을로 불린다.
내동은 1860년경 밀양 박씨 박세응(朴世應)이 한양에서 이주해 등당의 안쪽에 마을을 이루었으므로 붙인 이름으로 지금은 내동과 붙어 경계가 없어졌다. 등당과 내동 사이에는 인천 이씨 문중 재실인 영정재(永正齋)가 높이 솟아 이 마을이 인천 이씨 집성촌임을 알려 주고 있다.
광암은 마을 입구에 크고 넓은 바위가 있어 붙인 이름이다. 나중에 ‘빛 광(光)’자를 써서 광암(光岩)으로 바뀌었다. 야산을 넘어서면 본동인 등당 뒤에 있는 마을이어서 뒷골이라고도 한다. 바위는 진입로 공사로 상당 부분이 잘려 나가 본 모습은 적잖이 훼손되었으나 아직도 집채만한 바위가 뚜렷이 드러나 있다. 풍수지리상 농소면과 경계를 이루는 대밭골 뒷산에서 내동과 광암을 가로지르는 야산의 산세가 예부터 학이 목을 길게 뻗치고 알을 품고 있는 명당으로 알려졌는데 실제로 내동 뒤에 알처럼 생긴 봉긋한 동산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