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320059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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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어음역 | Goindol |
영어의미역 | Dolmen |
이칭/별칭 | 지석묘,석붕,대석개묘,돌멘 |
분야 | 역사/전통 시대,문화유산/유형 유산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
지역 | 경상북도 김천시 |
시대 | 선사/청동기 |
집필자 | 배성혁 |
[정의]
경상북도 김천시에 산재하고 있는 청동기 시대의 무덤.
[개설]
고인돌은 청동기 시대의 대표적인 무덤으로서, 상석이 지상에 드러나 있고 하부에 지석(支石)이나 석곽(石槨), 석관(石棺)이 축조되어 있으며 주변으로 묘역이 있는 경우도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고인돌 또는 지석묘라 부르며, 일본에서는 지석묘, 중국에서는 석붕(石棚)·대석개묘(大石蓋墓), 유럽에서는 거석 기념물 또는 돌멘(Dolmen)이라고 부른다.
고인돌의 분포권은 북유럽, 서유럽, 지중해 연안, 북아프리카, 서남아시아 일대에서는 신석기 시대의 분묘로 사용되고 있다. 청동기 시대의 지석묘는 주로 일본 규슈[九州] 지방, 중국 동해안 지역과 둥베이[東北] 지방, 그리고 우리나라를 포함하여 주로 동북아시아에 집중되어 있는데, 그중에서도 약 4만여 기가 분포하는 우리나라에 가장 많다. 우리나라에서도 특히 전라남도에 2만여 기가 밀집 분포하고 있다.
한국의 고인돌은 일반적으로 외형적 형태를 기준으로 크게 탁자식(卓子式)[북방식], 기반식(基盤式), 개석식(蓋石式), 위석식(圍石式) 등으로 나눈다. 탁자식 고인돌은 잘 다듬어진 판돌을 3~4매로 짜 맞춘 석실을 지상에 축조하고 그 위에 편평하고 거대한 판돌상의 상석을 얹어 마치 책상 모양을 하고 있는데, 주로 한강 이북에 주 분포권을 이루고 있으므로 북방식 고인돌이라고 불린다.
기반식 고인돌은 판석이나 할석으로 만든 석곽 또는 석관을 지하에 마련하고, 그 상부에 지석을 놓은 후 대형의 상석을 얹어 마치 바둑판 모양을 하고 있는데, 주로 호남과 영남 등 남쪽에 집중되어 있어 남방식 고인돌이라 부른다. 개석식 고인돌은 지하에 만든 석곽 위에 바로 상석을 얹은 구조로 랴오둥 반도[遼東半島], 한반도, 일본 규슈 지역에 널리 분포하고 있는데, 지석이 없어 무지석식 고인돌로 부른다. 위석식 고인돌은 상석 밑에 자연석이나 할석을 수 매를 돌린 후 그 위에 상석을 얹은 구조이다.
고인돌의 매장 방법은 펴묻기[伸展葬], 옆으로 굽혀묻기[側臥屈身葬], 화장(火葬), 옆으로 묻기[側葬], 두벌묻기[洗骨葬] 등이 있으며, 한 사람만 묻는 것이 보편적이나 복수의 인물을 묻었을 가능성도 제기되고 있다. 부장 유물은 주로 내부 시설인 석실·석관에서 확인되며, 주변부에서 의례용(儀禮用) 유물이 출토되는 경우도 있다. 부장 유물로는 석검(石劍), 석촉(石鏃), 홍도(紅陶), 가지무늬토기[彩文土器], 각종 청동기(靑銅器), 옥제품(玉製品) 등이 있으며, 주변부에 매납(埋納)되는 의례용 유물로는 비파형동검(琵琶形銅劍), 홈자귀[有溝石斧] 등이 있다.
한편 고인돌 축조에 있어 가장 어렵고 중요한 작업이 거대한 상석의 채석과 운반에 관한 것이다. 상석은 주변 산에 있는 바위를 그대로 옮겨온 경우도 있으나 대부분 암벽에서 떼어내서 다듬은 바위를 이용하며, 운반과 축조는 많은 사람이 동원되는데 상석의 규모로 보아 적게는 50여 명에서 많게는 200~300명 정도가 동원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이러한 점으로 인해 고인돌 문화는 수많은 인력 동원이 가능한 정착 농경 사회에서 발생한 것으로 보기도 한다.
이와 더불어 우리나라의 고인돌 사회에 대해서는 씨족 사회설, 부계제 사회설, 부족 사회설, 족장 사회설, 공동체 사회설 등의 다양한 견해들이 제시되고 있다. 고인돌의 기원에 대해서는 우리나라에서 자생하였다는 자생설, 동남아시아에서 해로를 통해 전파되었다는 남방설, 그리고 북방의 돌널무덤에서 파생되었다는 북방설 등이 있다.
[분포 양상]
김천 지역의 고인돌 및 고인돌군은 전역에 걸쳐 분포하고 있는데, 주 하천인 감천과 주변 지류인 직지천·아천·부항천 등의 하천변의 충적지와 인접한 나지막한 구릉지에 위치하고 있다. 그리고 발굴 조사된 송죽리 고인돌군이나 신옥리 고인돌군의 경우, 동시기 대규모 마을 주변에서 수기 혹은 수십 기가 군을 이루며 조성되어 있어 청동기 시대 마을 주변에 집단으로 조성되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생계는 주로 하천의 어패류나 충적지의 농사를 통해 꾸려왔음을 알 수 있다.
지금까지 김천 지역에서 확인된 청동기 시대 고인돌은 문무리 고인돌군, 송북리 고인돌, 보광리 고인돌군, 삼성리 고인돌군, 광덕리 고인돌군, 능치리 고인돌, 중왕리 고인돌, 옥률리 고인돌, 예지리 고인돌군, 덕천리 고인돌, 문당동 고인돌군, 삼락동 고인돌, 양천동 고인돌, 부상리 고인돌군, 송죽리 고인돌군, 상원리 고인돌군, 미평리 고인돌군, 구미리 고인돌, 임천리 고인돌군, 관덕리 고인돌군, 사등리 고인돌군, 지좌리 고인돌군, 유촌리 고인돌군, 신옥리 고인돌군, 가례리 고인돌군 등으로 25곳에서 90여 기가 확인된 바 있으며, 그 밖에 과거 건축·도로 등 각종 개발 공사나 경지 정리 등으로 인해 인멸된 것이나 아직 발견되지 않은 것을 포함하면 수백 곳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 분포 양상을 살펴보면 대체로 어모면, 감문면, 봉산면, 김천시 등의 지역권과 구성면, 지례면, 부항면, 대덕면 등의 지역권으로 크게 나누어지며, 주로 감천의 북쪽에 편재하는 경향을 보인다. 고인돌은 20여 기 정도가 군집을 이루는 경우도 있으나 주로 2~3기가 모여 있고 1기가 독립적으로 분포하는 예도 많다. 그리고 대체로 상석만 드러나 있고 지석의 유무를 확인할 수 있는 것은 많지 않은데, 크기는 대체로 길이 3m, 너비 2m, 두께 50㎝ 정도의 길쭉하고 얇은 것이 다수를 차지하며, 드러난 상면에 바위 구멍이 새겨진 예도 있다.
[구조]
김천 지역 내 고인돌의 구조에 대해서는 이미 발굴 조사가 이루어진 송죽리 고인돌군과 신옥리 고인돌군을 통해 개략적으로 살펴볼 수 있다. 송죽리 고인돌군은 상석이 남은 8기와 하부 구조 11기를 포함하여 19기가 조사되었는데, 주로 충적 대지에 형성된 취락의 북반부에 집중 분포하고 있다. 주거지의 경우처럼 일정한 시기 차를 가지면서 조영된 것으로 추정되지만 일정한 공간에 집중된 묘역을 형성하고 있는 것으로 볼 때 주거지의 축조 시기와 병행하여 조영된 것으로 이해된다.
상석이 확인된 것은 8기이지만 상석과 같은 재질의 석재가 논이나 민가의 축대로 사용된 것으로 보아 원래는 대다수가 상석을 갖추었던 것으로 추정되며, 일부 드러난 상석의 상면에는 바위 구멍이 새겨진 예도 있다. 규모가 가장 큰 제19호 고인돌의 상석의 규모는 길이 490㎝, 너비 310㎝, 두께 56㎝ 정도이며 대부분의 상석은 200~300㎝ 정도 된다.
매장 주체부의 위치는 반지하식 2기를 제외하면 모두 지상식으로 확인되었다. 하부 석곽은 대부분 강돌을 사용하여 축조하였는데, 평면 형태는 장방형 석곽과 구덩식 석곽으로 나타나며, 이러한 구조적 특징은 시기 차를 반영하고 있다. 하부 구조의 배치 형태는 단독인 경우가 대부분이지만, 하나의 상석을 갖춘 한 봉석 내에 2기가 연접되어 나타나는 경우도 있다.
전체적인 고인돌군은 장방형 묘역의 중앙부에 석곽을 조성하고, 묘역의 경계석에 석곽을 연접시키며 새로운 묘역을 만들어 나가는 방식으로 하나의 거대한 묘역이 이루어진 형태이다. 한편 제4호에서 확인되는 인골을 통해 볼 때 머리 방향은 남향인 것으로 보이며, 부장품이 확인되는 고인돌에서는 보통 2점에서 5점 사이의 홍도가 출토되어 주목된다.
그 외 고인돌의 축조와 관련된 일종의 장송 의례 행위로 추정되는 흔적도 확인되었는데, 제1호 고인돌의 석곽 위에 불태운 흔적과 그 서쪽으로 1m 정도 떨어진 곳에 직경 30㎝ 정도의 구덩이를 파고 홈자귀[有溝石斧]를 꽂은 후 상면에 돌을 채워 매납한 경우도 있다.
제4호 고인돌의 경우에도 상석으로부터 동쪽으로 1m 정도 떨어진 중앙부에 비파형동검을 끝이 아래로 향하도록 꽂아 놓았다. 이와 같은 행위는 고인돌을 조영할 당시의 의례에서 기인한 것으로 보이며 홈자귀[有溝石斧]와 비파형동검의 용도는 사후 세계에서 피장자를 안전하게 지켜주는 상징물의 역할을 한 것으로 여겨진다.
신옥리 고인돌군은 나지막한 구릉의 말단부에 2기가 확인되었는데, 모두 도굴된 상태였다. 제1호 고인돌은 장방형 석곽으로 추정되는 하부 구조 일부와 상석이 남아있으며, 상석의 규모는 길이 310㎝, 너비 250㎝, 두께 40㎝ 정도로 송죽리 제4호 고인돌의 크기와 비슷하다. 제2호 고인돌은 구덩식 석곽의 형태로 주변에 흩어진 석재들로 보아 묘역이 조성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그리고 도굴된 고인돌 2기의 하부 구조 내부에서 홍도편 일부와 민무늬 토기가 출토되었다.
[특징과 평가]
김천 지역의 고인돌은 그 분포 양상과 발굴 조사 성과를 통해 하천변 충적 대지에 형성된 대규모 마을에 살던 청동기인의 집단 분묘임을 알 수 있다. 고인돌의 상석은 주로 주변에서 구하기 쉬운 자연석을 이용하였고, 매장 주체부는 시기적인 차는 있으나 천석을 이용하여 지상식의 장방형 석곽이나 구덩형 석곽으로 축조하였다.
전체적인 고인돌 묘역의 구성은 여러 기의 석곽과 묘역을 연접시켜 하나의 거대한 묘역을 갖추는 구조, 2기 정도를 연접한 후 하나의 묘역으로 만들고 중앙부에 상석을 얹는 구조, 단독으로 조성된 구조 등이 확인된다. 피장자의 두향은 남향인 것으로 보이며, 매장 주체부에는 보통 2점에서 5점 사이의 홍도를 부장하고 있다.
이러한 김천 지역의 고인돌은 축조 방법이나 매장 의례에 있어 경상북도 내륙에서 확인되는 일반적인 고인돌과는 다른 특징을 보이고 있다. 먼저 연접한 거대한 묘역을 조성한 점, 하부 구조가 지상식으로 축조된 것이 많고 지하식일지라도 판석을 이용한 석관 형태는 보이지 않는다는 점, 부장 유물이 홍도에 국한된다는 점, 장송의례와 관련하여 석곽 위에 불을 태우거나 일정 거리를 떨어져서 비파형동검이나 홈자귀[有溝石斧]를 꽂은 점 등이 그것이다.
이러한 특징은 청동기 시대 김천 지역의 생활 문화권이 낙동강 수계에 집중된 것이 아니라 서쪽 소백산맥을 넘어 금강 수계의 문화권과도 지속적인 교류가 있었음을 반영하는 것으로, 이러한 문화적 특징은 신석기 시대 이후 이어진 것으로 추정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