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320121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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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金始昌孝節閣 |
영어음역 | Gim Sichang Hyojeolgak |
영어의미역 | Memorial Shrine to Gim Sichang |
분야 | 종교/유교,문화유산/유형 유산 |
유형 | 유적/건물 |
지역 | 경상북도 김천시 봉산면 신암리 662 |
시대 | 조선/조선 전기 |
집필자 | 정혜숙 |
개축|증축 | 1950년 이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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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립 | 조선 전기 |
현 소재지 | 경상북도 김천시 봉산면 신암리 662 |
성격 | 효절각 |
정면 칸수 | 1칸 |
측면 칸수 | 1칸 |
[정의]
경상북도 김천시 봉산면 신암리에 있는 조선 전기 효자 김시창의 효절각.
[개설]
김시창(金始昌)[1472~1558]은 해풍(海豊) 사람으로, 호는 남정(嵐亭)이다. 1472년(성종 3) 금릉군 대항면 대룡리에서 태어났다. 천성이 지효하여 어머니를 모심이 지극하였고 그의 학문은 사림의 추앙을 받을 만큼 깊어 조광조의 추천으로 참봉에 제수되었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어머니 상을 당하매 거려(居廬)[묘 옆에 막을 매고 묘소를 지키는 예법] 3년의 법도가 남의 본이 될 정도였다고 한다.
효성만 지극한 것이 아니어서 20세 때 성종이 죽은 것을 필두로 중종·인종 등 임금이 승하할 때마다 신하로서 제례를 극진히 하여 지극한 충성이 세상에 널리 알려졌다. 특히 인종의 승하시는 나이 70이 넘었는데도 복례(復禮)에 어긋남이 없었다고 하니 효(孝)를 충(忠)으로 승화한 사람이라 할 만하다.
김시창이 죽은 후 조정에서 그의 정성을 가상히 여겨 정려를 내리고 명종 때 효절(孝節)이라는 시호를 내렸다. 우암(尤庵) 송시열(宋時烈)은 묘비 표에 김시창의 충효는 만인의 본이 된다고 썼다. 그의 효절은 『삼강록(三綱錄)』에 실렸으며 묘소는 봉산면 고도암리에 있고, 경렴서원과 송계서원에 제향되었다.
[변천]
경상북도 금릉군 대항면 향천리에 정려각을 세웠으나 6·25전쟁 때 파기되어 신암리(新岩里)에 다시 세워졌다.
[형태]
낮게 연결된 돌기둥들이 건물을 둘러싸고 있다. 건물은 정면 1칸, 측면 1칸으로 구성된 겹처마 목조 기와집이다. 약 20㎝ 높이로 시멘트로 사각 대석 위에 세워져 있으며, 건물 내부 바닥은 시멘트로 되어 있다. 뒷면을 제외한 삼면이 홍살로 되어 있으며 정려각 안의 정판에는 ‘사호효절김시창지려(賜號孝節金始昌之閭)’라 음각되어 있고, 비의 앞면에는 ‘효절공남정김선생시창지려(孝節公嵐亭金先生始昌之閭)’라 새겨져 있다.
[현황]
작은 도로에서 길 안쪽으로 들어가면 쉽게 찾을 수 있으며 건물로 올라가는 돌계단 역시 튼튼하게 만들어져 있다. 단청이나 건물 상태가 양호한 편이다. 다만 건물 바깥쪽에 풀들이 많이 자라 정비가 필요하다.
[의의와 평가]
부친상을 당하여 여막을 짓고 3년 상을 치를 때 호랑이가 옆을 지켰다는 얘기가 퍼질 정도로 효행이 남달랐다. 점점 각박해져 가는 현대 사회에서의 가족, 특히 부모와 자식 간의 관계를 다시 돌아볼 수 있게 만든다. 효절각 주변에 안내판을 설치하면 찾기도 쉽고 더욱 많은 사람들에게 좋은 볼거리가 될 수 있을 것으로 생각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