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320023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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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新岩里 |
영어음역 | Sinam-ri |
분야 | 지리/인문 지리 |
유형 | 지명/행정 지명과 마을 |
지역 | 경상북도 김천시 봉산면 신암리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송기동 |
[정의]
경상북도 김천시 봉산면에 속하는 법정리.
[명칭 유래]
1914년 행정 구역 개편 때 신촌(新村)의 ‘신’자와 고도암(高道岩)의 ‘암’자를 따서 신암(新岩)이라 하였다.
[형성 및 변천]
조선 말 충청북도 영동군 황남면에 속했던 지역으로 1914년 신촌과 고도암이 통합되어 경상북도 김천군 봉산면 신암동으로 개편되었고, 1949년 금릉군 봉산면 신암동이 되었다. 1988년 동(洞)을 리로 바꾸어 신암리가 되었고, 1995년 김천시 봉산면 신암리가 되었다.
[자연 환경]
도로변과 산악 지대에 폭넓게 마을이 산재해 있고 멀리 바라다 보이는 가성산[788m]을 중심으로 산줄기가 마을을 좌우로 보호하고 있다. 마을 앞산에 밥그릇 모양의 식기암(食器岩)이 있는데 손으로 두드리면 북처럼 소리가 울린다고 한다.
[현황]
신암리는 봉산면 소재지에서 국도 4호선을 따라 동북쪽으로 약 8㎞ 떨어져 있다. 2010년 11월 30일 기준 면적은 10.18㎢이며, 2015년 12월 31일 현재 인구는 총 217세대에 439명(남자 235명, 여자 204명)의 주민이 살고 있다. 동쪽으로 상금리, 서쪽으로 충청북도 영동군 매곡면, 남쪽으로 태화리, 북쪽으로 광천리와 이웃하고 있다. 신암1리·신암2리 두 개 행정리로 이루어졌으며, 해풍 김씨·충주 박씨 집성촌이다. 경부선철도 신암역이 있고, 포도를 주로 재배한다.
문화 유적으로는 김시창 효절각이 있다. 김시창(金始昌)[1472~1558]은 해풍 김씨로 어머니가 세상을 떠나자 3년간 정성으로 시묘(侍墓)를 하였고, 성종·중종·인종이 붕어(崩御)했을 때도 부모상과 같이 3년간 신하의 예를 다하여 세인의 칭송을 받았다. 조광조(趙光祖)의 추천으로 관직이 제수되었으나 ‘천성을 지키고 자신을 살핌[存養省察]’을 신조로 학문에만 전념하였다. 세상을 떠난 뒤 왕이 예관을 보내 치제(致祭)하고 절효(節孝)라는 시호와 정려를 내렸다.
자연 마을로는 신촌·고도암·가성(柯城)·신기(新基) 등이 있다. 신촌은 원래 현재의 마을에서 북쪽으로 500m 떨어진 조삼(鳥三)이었는데 임진왜란을 전후한 시기에 산사태로 마을이 매몰되어 지금의 위치에 새로 마을을 이루었다 하여 붙인 이름이다. 고도암은 경부선철도를 배후로 그 아래에 자리 잡은 마을이다. 마을 뒷산에 10m 남짓한 큰 바위가 있어 붙인 이름이다. 김시창 효열각의 주인공인 김시창이 처음 정착해 마을을 개척한 이래 대대로 해풍 김씨 집성촌을 이루고 있다.
가성은 신촌을 지나 추풍령 방면으로 가다 신암천 건너 가성산 아래에 자리 잡은 마을이다. 마을 뒤 가성산에서 뻗어 내린 산세가 마을 주변을 성(城)처럼 에워싸고 있어 붙인 이름이다. 지명에 ‘식기 가(柯)’자가 들어간 사연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설이 있던 차 내가성 앞산에 밥그릇 모양의 식기암이 있는 것으로 미루어 이 바위가 마을 지명에 영향을 미친 것으로 여겨진다.
마을 주민에 따르면, 가성은 원래 내가성 안쪽 가성산 아래에 있던 상마(上馬)라는 마을이 본 마을로, 영일 정씨와 본관을 알 수 없는 장씨 일가 10여 호 마을을 이루어 살다가 임진왜란을 전후한 시기에 화적의 습격이 잦아지자 아래로 내려와 새로운 마을인 내가성을 이루었다. 이후 6·25전쟁 때 폭격으로 마을이 파괴되자 많은 주민들이 다시 아래로 옮겨 와 지금의 외가성에 정착하였다.
외가성을 벗어나 추풍령 방면으로 조금 가면 왼쪽 석재 공장 자리가 한양으로 올라가는 고을 원이 쉬어 가던 원터이다. 실제로 이곳은 조선 시대에 김산군에서 관할하던 당지원(堂旨院)이라는 관용 숙소가 있었다. 신기는 원터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자리 잡은 마을이다. 1800년경 임정(林鼎)이란 선비가 지금의 경부선철도가 지나는 산 아래에 집을 짓고 살면서 마을이 이루어져 서낭당이라는 이름으로 불렸는데 1905년 경부선철도가 놓이면서 폐동되고 지금의 자리로 이주하여 새로 마을을 이루었으므로 붙인 이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