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170258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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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廣程驛 |
영어음역 | Gwangjeongyeok |
영어의미역 | Gwangjeong Post Station |
분야 | 역사/전통 시대 |
유형 | 제도/법령과 제도 |
지역 | 충청남도 공주시 정안면 광정리 |
시대 | 고려/고려,조선/조선 전기 |
집필자 | 홍제연 |
[정의]
조선시대 충청남도 공주시 정안면 광정리에 설치된 교통 통신 기관.
[관련기록]
『세종실록지리지』에는 “역이 6곳이니 일신·광정·경천·이인·단평·유구이다.”라 기록되어 있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주 북쪽 45리에 있다. 설장수의 시에 ‘아침 해 둥그렇게 뜨자 광정역을 떠나니, 흰 구름이 깊숙이 일만 산 푸른 것을 깊이 감추었네. 들꽃 난만히 주인 없이 피어서 봄빛을 단장하여 그림 병풍을 이루었네’라고 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여지도서』에는 “주의 북쪽 40리 정안면에 있다. 기마 7필, 복마(卜馬) 8필, 노 31명, 비 19명이 있다.”고 기록되어 있고, 『충청도읍지』에는 “주의 북쪽 40리 정안면에 있다. 기마 7필, 복마 8필, 노 31명, 비 19명이 있다.”고 기록되어 있다. 『대동지지』에는 “예전에는 광정이라 불렀으며 서쪽 15리에 있다.”고 기록되어 있고, 『공산지』에는 “부의 북쪽 40리 정안면에 있다. 기마 7필, 복마 8필, 노 31명, 비 9명이 있다.”고 기록되어 있다.
[내용]
서울과 목포를 잇는 국도 1호선이 개설되기 전에는 호남과 영남의 분기점인 천안을 지나 호남으로 이어지는 첫 관문이 차령고개였다. 그래서 공주 사람들은 물론이고 호남 사람들이라면 서울로 가기 위해 반드시 이 고개를 넘어야 했으며, 이런 이유로 고려시대부터 정안면 광정리에 역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또한 마을에 역이 있어 충청감사나 전라감사가 임지로 갈 때 이곳에서 말을 쉬어 가기도 하였다. 이렇게 고려시대부터 조선시대까지 현재의 광정은 교통의 요지로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고 있었다.
[변천]
광정역은 경천역·평천역·단평역·유구역 등과 함께 일신도(日新道)[조선시대 충청도 공주의 일신역을 중심으로 한 역참]에 속하였다가, 세조 때 성환도(成歡道)[조선시대 충청도 직산의 성환역을 중심으로 한 역참]에 병합되어 성환도에 속한 22개 역 중 하나가 되었다.
[현황]
광정역은 조선시대 정안면에 있던 역참으로 삼남으로 연결되는 제일로에 있었으나 현재는 역참의 흔적을 찾아볼 수 없다. 다만 광정리나 역말 등의 마을 이름을 통해 예전에 역참이 존재하였음을 추측할 수 있다.
[의의와 평가]
역참은 조선시대 중요한 교통 시설로 당시의 교통 체계나 도로 체계를 가늠해 볼 수 있는 중요한 자료이다. 이 광정역을 통해 당시의 정안면과 주변 지역의 도로망이 어떻게 연결되어 있었는지 추측해 볼 수 있다. 또한 단편적인 자료들이지만 읍지나 지리지 등에 남아 있는 기록들로 당시 역참이 어떻게 운영되었는지 알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