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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구역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1702596
한자 維鳩驛
영어음역 Yuguyeok
영어의미역 Yugu Traffic Post Station
이칭/별칭 역촌·유구역촌·역말
분야 역사/전통 시대
유형 제도/법령과 제도
지역 충청남도 공주시 유구읍 유구리
시대 고려/고려,조선/조선 전기
집필자 홍제연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폐지연도/일시 1984년연표보기

[정의]

고려시대와 조선시대 충청남도 공주시 유구읍 유구리에 설치된 교통 통신 기관.

[제정경위 및 목적]

유구역이 있던 지역은 호남과 서울을 연결해 주는 중심 통로로 조선시대 교통로에서 빼놓을 수 없는 곳이었다. 이곳을 지나는 사람들이 많아지자 행인들의 이동에 편의를 제공하고 나라의 중요 역원으로서 기능을 하기 위해 설치하였다.

[관련기록]

『세종실록지리지』에는 “역이 6곳이니 일신·광정·경천·이인·단평·유구이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신풍(新豊) 서쪽 8리에 있다.”고 기록되어 있다.

『보한집(補閑集)』에는 “고려 의왕이 음악과 여색을 가까이 하고 놀이를 좋아하므로 정언(正言) 문극겸(文克謙)이 소(疏)를 올려 간절히 간하였으나 듣지 않았다. 문극겸이 드디어 집에 돌아와 시를 짓기를 ‘주운(朱雲)이 난간 꺾은 것이 이름을 구함이 아니며, 원앙(袁盎)이 수레를 막은 것이 어찌 제 몸을 위함이랴. 한 조각 정성 하늘이 몰라주니 파리한 말을 채찍질하여 머뭇거리며 물러왔네’라고 하였더니, 경인년(1170) 봄에 무신들이 난을 일으켜 왕이 남쪽으로 옮기게 되었다.

계사년(1173) 겨울에 새로 이 역을 수리할 때에 공장(工匠)을 불러서 벽에 단청을 하였다. 공장은 당시의 묘수(妙手)로 성은 박씨이며, 이름은 잊었는데, 침실 서쪽 벽에 흰옷에 갓 쓰고 말 탄 사람이 시름없이 말 가는 대로 산길을 따라 서서히 가는 것을 그렸으니 행색이 처량하였다.

지나가는 사람들이 이를 보아도 무슨 그림인 줄을 몰랐는데, 뒤에 송광사(松廣寺)의 무의자(無衣子)가 승려 1천 명을 인솔하고 서원(西原)[청주]으로 가는 길에 이 역에 투숙하였다가 이 그림을 보고 한참 동안 탄식하더니, 하는 말이 ‘이것은 바로 간신(諫臣)이 서울을 떠나가는 그림이다’라고 하고 드디어 시를 짓기를 ‘벽 위에 이 그림을 뉘 그렸는고. 간하던 신하 서울 떠나니, 일이 위태하네. 산승(山僧)이 그림 보고 오히려 서러워하거늘 하물며 벼슬하는 사대부랴!’라고 하였다.

뒤에 지나가던 두 행인이 또 그 시를 보고 차운(次韻)하여 벽에 쓰니 ‘곡돌(曲堗)로 하라는 앞 말을 일찍 도모하지 못하고, 머리 데고 나서 후회한들 쓸 데 있나. 그 누가 이 간신의 가는 모습을 그렸는고. 벽 위에 가득 찬 맑은 바람이 나부(懦夫)를 격동시키네’라고 하였고, 또 한 시에는 ‘흰옷에 누런 띠 간신의 그림, 이가 바로 굴원(屈原)인가, 미자(微子)인가. 임금의 잘못을 바로잡지 못하고 헛되이 나라 떠나니 붓끝에 그림 솜씨 허비하여 무엇 하리’라고 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여지도서』에는 “주의 서쪽 50리 신상면(新上面)에 있다. 기마 5필, 복마(卜馬) 5필, 노(奴) 38명, 비(婢) 18명으로 이상은 성환도(成歡道)[조선시대 충청도 직산의 성환역을 중심으로 한 역참] 소속이다.”고 기록되어 있다. 『호구총수』에는 “부의 서쪽 50리 신상면에 있다. 기마 5필, 복마 5필, 노 29명, 비 17명이 있다.”고 기록되어 있고, 『공산지』에는 “부의 서쪽 50리 신상면에 있다. 기마 5필, 복마 5필, 노 29명, 비 17명이 있다.”에 기록되어 있고, 『선조실록』에는 “왕세자가 저녁에 유구역에 머물렀다.”고 기록되어 있다.

[내용]

유구역역촌, 유구역촌 또는 역말이라고 불렀다. 현재 유구읍 유구1리 창말에 유구역이 있었다. 유구역은 호남 지방에서 한양으로 가는 지름길로 역마나 노복을 두어 행인들의 편리를 도모하였고, 나라의 역참으로서 중요한 역할을 많이 한 곳이었다.

사람들의 왕래가 많아짐에 따라 유구역은 크게 발전하였고, 임진왜란 때에는 백성들의 피난지로서 사람들이 몰려들어 왜군과 크게 싸우기도 했던 곳이다. 유구역이 있던 곳에는 현재 마을이 자리 잡고 있다.

[변천]

1914년 일제의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유구역이 있던 유구면 석남리가 지금의 유구읍 유구리가 되었다.

[의의와 평가]

조선시대의 사회적·경제적 구조는 상공업을 천시하여 교통망과 통신 시설이 매우 미비하였다. 교통의 경우 육상 운송을 위한 역(驛)·원(院)이 설치되었는데, 사회·경제적 측면보다 행정과 군사의 중요성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이러한 사회상이 점차 조선 말기로 가면서 상공업을 중시하는 사회로 변화하는 데 역의 발전이 큰 역할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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