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170047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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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亡伊-亡所伊-亂 |
영어의미역 | Mangi and Mangsoi's Rebellion |
이칭/별칭 | 망이의 난 |
분야 | 역사/전통 시대 |
유형 |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
지역 | 충청남도 공주시 |
시대 | 고려/고려 후기 |
집필자 | 이정신 |
[정의]
1176년(명종 6) 공주 명학소에서 망이·망소이의 주도로 일어난 민란.
[역사적 배경]
무신 집권기에 들어서면서 중앙 정부의 지방 통제력 약화, 신분제의 변화, 지방관의 수탈 등이 원인이 되어 전국 곳곳에서 민란이 일어났는데, 특히 소(所)는 특산물을 생산하여 국가에 공납하는 지역으로서 국가나 지방관에 의한 수탈은 다른 지역보다 욱 심각했다.
[경과]
1176년(명종 6) 정월에 공주에 딸린 천민 마을인 명학소(鳴鶴所)에서 망이·망소이가 자칭 산행병마사(山行兵馬使)라 칭하고 민란을 일으켰는데 그 목적은 국가의 가혹한 수탈 체제를 벗어나기 위한 신분 해방이었다. 망이·망소이는 공주를 함락시키고 서북쪽으로 진격하여, 중앙에서 파견 나온 대장군 정황재(丁黃載)가 이끄는 3천의 군대를 격파하였다.
이에 정부는 명학소를 충순현(忠順縣)으로 승격시켜 현령(縣令)과 현위(縣尉)를 파견하는 등 회유책을 썼다. 망이·망소이 등은 이에 응하지 않았으나 내부적으로 명학소만 승격되고 다른 지역에는 아무런 혜택이 없게 되자 갈등이 일어났다. 한편, 정부는 다시 대장군 정세유(鄭世猷)와 이부(李夫)를 보내어 대대적인 토벌 작전을 벌이는 등 강온 양면책을 병행하였다. 결국 1177년 1월 망이·망소이는 강화를 요청하였고 민란은 일단 진정되었다.
정부는 망이·망소이 등을 회유한 후 가족을 인질로 가두어 재봉기를 방지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이것이 오히려 공주 명학소 주민들을 분노케 해 1177년 2월 제2차 민란이 일어나게 된다. 이제 망이·망소이 등은 신분 해방이 기존 지배 질서가 무너지지 않는 한 해결될 수 없음을 자각하고 고려 정부에 대해 전면전을 선포하였다.
관아(官衙) 뿐만 아니라 지배층만을 대변하던 사원에 대해서도 적대감을 드러내어 가야사(伽耶寺)를 침략한데 이어 홍경원(弘慶院)을 불태우고 승려 100여 명을 죽였다. 또한, 아주(牙州)를 함락시키고, 청주목(淸州牧)의 거의 모든 군현을 점령하였다.
[결과]
망이·망소이의 난은 소민이나 군현민의 큰 호응을 얻어 1년 반 동안 충청도 전역을 확보할 정도였다. 이에 정부는 충순현을 다시 명학소로 강등시키고 군대를 대대적으로 파견해 망이·망소이 등을 토벌하였다. 그 결과 망이·망소이 등은 큰 타격을 입었고 1177년 7월 망이·망소이가 붙잡힘으로써 1년 반 동안의 민란은 막을 내리게 된다.
[의의와 평가]
망이·망소이의 난은 신분 해방 운동과 농민 반란의 성격이 결합된 것으로서 그 의미를 네 가지 정도로 요약해 볼 수 있다. 첫째, 고려 사회의 억압적 신분 질서를 타파하고자 피지배층이 그들의 요구를 당당히 내세웠다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가 있다.
둘째, 정부에게는 난을 통해 백성을 재인식하는 계기가 되기도 하였다. 난이 진압된 이후, 정부는 난이 소에 한정되지 않고 광범위하게 확산된 데 주목하면서 미봉적인 조처나마 각지에 찰방사를 보내어 지방관의 탐학 여부를 조사하여 개선하고자 하였던 것이다.
셋째, 난의 여파로 정중부(鄭仲夫) 정권의 체제가 흔들리게 되어, 경대승(慶大升)에게 정권이 넘어가는 중요한 요인의 하나가 되었다. 넷째, ‘망이’, ‘망소이’라는 피지배층 출신 지도자가 나왔으며, 이후에 일어났던 민란의 효시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