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170047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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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義兵 |
영어음역 | Righteous Army |
영어의미역 | Righteous Army |
분야 | 역사/전통 시대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
지역 | 충청남도 공주시 |
시대 | 조선/조선 |
집필자 | 김경수 |
[정의]
조선 중기 임진왜란 때 공주 지역에서 일반 백성과 승려들로 구성되어 활동한 민간 군사 조직체.
[개설]
임진왜란 때 공주 지역에서는 영규대사(靈圭大師)[?~1592]를 중심으로 500명의 승병이 궐기하였다. 영규는 갑사(甲寺) 청련암(靑蓮庵)의 승려로 속성은 박씨이며, 계룡면 월암리에서 출생하였으며, 무예 익히기를 즐겼다. 영규가 의승군(義僧軍)을 일으킨 시기는 자세히 알 수 없다. 선조가 파천하자 몹시 분개하여 3일간 통곡하다 의승 수백 인을 규합하였다는 기록으로 보아 선조가 파천한 6월의 어느 시기인 것으로 추정된다.
[의승군의 활약]
영규는 “우리들이 일어난 것은 조정의 명령이 있어서가 아니다. 죽음을 두려워하는 마음이 있는 자는 나의 군대에 들어오지 말라”고 하였다. 이에 스스로 앞장서서 모여든 인원이 800여 명이라 한다. 영규는 이들과 함께 청주성으로 진격하였다.
영규의 승군은 왜군의 주요 후방 주둔지였던 청주로 나아가 조헌(趙憲)의 의병과 합세하였다. 이때 청주성에는 7,000명의 왜군 병력 중의 일부가 주둔하고 있었고, 의병과 승병 연합군은 2,000명이었다. 8월 1일 아군의 선제 공격으로 청주성 전투가 시작되었다. 전투가 치열하게 전개되면서 왜군은 마침내 많은 사상자를 내고 퇴각하였다. 이 전투는 충청도의 의병과 승병이 거둔 첫 승전이었다.
[의의와 평가]
임진왜란 당시 사림의 중망을 받으며 호서의병을 이끈 조헌의 의병진과 영규의 의승군은 부산과 서울을 잇는 요충지인 청주성을 탈환하여 남북으로 잇는 적의 연결망을 차단하는 데에 큰 역할을 하였다. 또한 금산성의 왜군 격퇴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조헌과 영규의 군대는 제2차 금산성 전투에서 비록 800여 명의 병사가 모두 순절했으나, 왜군을 금산성에서 물리쳐 큰 승리를 거뒀다. 왜군은 이 전투 이후 남쪽으로 퇴각하였고, 전쟁은 소강상태로 들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