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170101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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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金甲淳 |
영어음역 | Gim Gapsun |
영어의미역 | Gim Gapsun |
분야 |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
유형 | 인물/인물(일반) |
지역 | 충청남도 공주시 |
시대 | 근대/근대 |
집필자 | 김형국 |
[정의]
일제강점기 충청남도 공주 출신의 경제인.
[활동사항]
김갑순은 1872년(고종 9) 5월 김현종(金顯宗)의 차남으로 태어났다. 김갑순은 그의 부친과 형님의 요절로 13살 때인 1884년(고종 21)에 호주가 되었다. 김갑순은 조선 말기에 내장원봉세관(內藏院捧稅官)을 거쳐, 1906년에는 공주군수, 1911년 아산군수 등을 역임하였다.
김갑순은 1914년 충청남도 참사(參事)를 거쳐 1920년에는 충청남도 도평의회원(道評議會員)이 되었으며, 1921년부터는 중추원참의를 지냈다. 이후 중요 공직을 두루 거쳤는데 1938년까지 공주읍회원 2회, 중추원참의 3회, 충청남도 도회원 4회 이외에도 공주구제원장, 도농회부회장, 우성수리조합장 등의 공직을 역임하였다.
이러한 공직을 바탕으로 1930년에는 약 3,300만㎡(1,000만평)의 대토지와 유성온천, 조선신문사, 공주읍 시장, 승합차회사 등 여러 기업을 소유한 갑부가 되었다. 김갑순은 이재 능력이 탁월했던 것으로 보인다. 충청남도 도청이 대전 지역으로 옮겨진다는 정보를 입수하고서, 식산은행에서 저리의 은행 돈을 빌어 대전역 주변의 땅을 선점하였고, 1932년 10월 충청남도 도청이 공주에서 대전으로 이전되면서 막대한 부를 축적할 수 있었다.
당시 대전 시가지 땅은 김갑순과 일본인 토지회사 등 미리 개발정보를 입수한 몇몇 거대 지주들에 의해 점유되었는데, 1938년 당시 대전 시가지의 토지 면적이 1,907,400㎡(57만 8천 평)이었는데, 그 중 김갑순의 소유지가 726,000㎡(22만 평)이나 되었다.
그러나 김갑순의 부는 해방과 더불어 몰락하게 된다. 1949년 농지 개혁, 1953년 화폐 개혁, 그리고 친인척 간의 재산 분쟁으로 급속하게 몰락하였다. 1949년에는 반민족 행위 혐의로 체포되었으나, 처벌은 받지 않았다. 김갑순은 재기를 위해 1950년 5월 30일에 치러진 국회의원 총선거에 두 아들과 장손자를 공주 지역과 대전 지역에 출마시켰다. 그러나 엄청난 돈을 투입하고도 모두 참패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