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1702058 |
---|---|
한자 | 孔岩里塔祭-長丞祭 |
영어의미역 | Pagoda Religious Service and Guardian Post Religious Service of Gongam-ri |
분야 | 생활·민속/민속,문화유산/무형 유산 |
유형 | 의례/제 |
지역 | 충청남도 공주시 반포면 공암리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조훈성 |
성격 | 탑제|장승제 |
---|---|
의례시기/일시 | 음력 정월 14일 |
의례장소 | 공암리 마을 우측 팽나무 옆 할미탑 주변 |
신당/신체 | 할미탑|마을 입구 선돌 1기|마을 뒤편에 선돌 2기 |
[정의]
충청남도 공주시 반포면 공암리에서 음력 정월 14일에 마을의 안녕과 풍요를 기원하기 위해 지내는 마을 제사.
[개설]
충청남도 반포면 공암리에서는 매년 음력 정월 보름 전날인 14일에 탑제와 장승제가 치러진다. 공암리에는 매년 탑제를 올리는 ‘탑할머니(보살탑)’와 3기의 선돌이 있다. 마을 사람들은 이 탑과 선돌을 마을의 수호신으로 굳게 믿어, 마을굿의 신앙 대상물로서 치성을 드리고 있다. 탑할머니는 마을 동쪽 천변제방 밑에 세워졌다. 탑의 형태는 원추형 돌탑 모양으로, 탑의 위층은 넓은 판돌을 깔고 사람의 두상과 같은 타원의 머릿돌을 올려놓은 형태를 하고 있다. 그리고 ‘수구(水口)막이’로 인식되는 선돌은 마을 앞 남쪽과 북쪽에 각각 위치한다.
공암의 수호신으로서 치성을 받고 있는 탑과 선돌은 모두 물과 연관이 있다. 공암리에는 금강의 지류인 용수천이 흐르는데, 이 용수천은 계룡산을 발원하여 박정자를 거쳐 공암 옆을 지나 연기·금남으로 흘러간다. 마을 사람들에 따르면 옛날부터 용수천은 마을 사람들에게 고기잡이·농사·생활용수를 공급해왔으나, 여름철 장마에는 금강이 범람하여 강 주변과 마을로 물이 역류되어 마을이 자주 침수 피해를 당했다고 한다. 이러한 홍수에 대한 마을 사람들의 공포는 자연스럽게 수해에 대한 두려움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의식을 만들어냈다. 이것이 공암리 탑제와 장승제로 이어져온 것이다.
[연원 및 변천]
탑할머니 옆에 세워진 비석은 ‘보살탑열기(菩薩塔閱記, 1989년)’라고 불리는데, 그곳에 ‘할머니탑’의 유래가 적혀 있다. 지금부터 약 350여 년 전, 즉 조선 중엽인 인조 때 보살이 현몽하여 마을 사람들이 돌로써 탑을 쌓아 묘를 만들고 장례를 지내주면서 시작되었다. 그 후 동리에서는 악마와 같이 돌아오는 질병을 막을 수 있었고, 관재구설수나 한해 등의 재난을 몰아냈으며, 농사에는 오곡이 풍년이요 육축이 번식하였다. 이를 기념하여 매년 정월 십사일 저녁에는 마을 사람들이 정성껏 제수를 마련 제사를 올려 추모해왔다.
그 후 약 150여 년 전 어느 날 밤 보살이 다시 나타나 현몽하기를 ‘나의 무덤인 석탑을 내 건너편(지금의 위치)으로 속히 옮겨달라’하여 옮겼다. 그날 밤 대홍수가 내려 그전 탑자리는 홍수가 휩쓸고 각처에서 수해가 막심했으나, 공암에는 수해가 전혀 없었다 한다. 보살은 현명하게도 우리 마을을 용수로부터 피해를 미리 막았던 것이다. 그리하여 마을 사람들은 보살의 덕이라고 생각하고 감사하며 세칭 탑할머니라고 칭하고, 지금까지 동신으로 모셔 추모하고 있다.
원래 탑 옆에는 오래된 팽나무 한 그루가 탑과 함께 있었다고 한다. 그래서 그곳을 ‘팽나무거리’, ‘탑거리’라고 불렀는데, 1989년 태풍으로 뿌리가 뽑혀 팽나무가 고사되고 탑신도 훼손되었다고 한다. 그래서 1989년 다시 탑을 중수하고, 일대를 새롭게 보수를 하면서 탑 뒤에 느티나무 한 그루를 심고, 팽락정(彭樂亭)이라는 육모정을 세웠다.
공암리 선돌은 수구막이로 알려져 오래 전부터 마을에서 모셔왔다. 남쪽에 1기와 북쪽에 2기가 있다. 남쪽 선돌은 마을에서 300~400m 떨어진 도로변 왼쪽 산 밑에 있는데, 2004년에 선돌 중간이 부러져서 훼손되는 바람에 다시 세운 것이라고 전한다.
한편, 북쪽의 선돌도 원래는 좌측의 선돌만이 마을에서 모셔오던 것으로, 우측의 선돌은 본래 지금의 위치에서 15m가량 떨어진 논 속에 세워져 있던 것이었다. 우측의 선돌은 개인이 고사를 지내던 것이었는데, 고사를 지내던 사람이 이사를 가고 그것이 방치되자 마을에서 이왕이면 그 선돌을 모셔와 함께 고사를 지내는 것이 낫겠다고 의견을 모아 지금의 위치에 짝을 이루어 세워놓게 되었다고 한다.
[신당/신체의 형태]
‘탑할머니’는 공암리 중앙에 위치해 있다. 잡석을 원뿔대 모양으로 약 2m 정도의 높이(높이 190㎝, 밑둘레 12.5m, 윗둘레 6.5m) 쌓아 올리고, 그 위에는 넓적한 자갈돌로 ‘탑윗돌’을 했다. 마을 사람들에 의하면 이 탑윗돌이 한 국가의 상징인 국기(國旗)나 어두운 곳을 환히 밝혀주는 촛불 같은 의미가 있다고도 한다. 탑 옆에 ‘보살탑열기(菩薩塔閱記, 높이 155㎝, 67㎝×106㎝)’가 있는데, 비석에는 ‘탑할머니’를 모시게 된 경위와 축문이 적혀져 있다.
공암리 탑할머니의 금줄은 액막이와 신성한 곳을 의미하는 기능이 있다. 금줄은 왼새끼로 꼬아져 있는데, 이것은 신성함을 의미하고 잡귀의 물리치고, 마을에 들어오는 재액(災厄)을 막는 의미가 있다. 새끼를 꼴 때 짚이 비죽 나오게 거칠게 꼬는 것은 척사를 위한 것이다. 공암리 탑 할머니의 금줄 역시, 왼새끼로 탑할머니가 마을을 지키는 수호신으로 받들어지고 있다는 것을 쉽게 짐작할 수 있다. 탑할머니 옆에는 육모정이라는 정자가 있다.
또 공암리 입구에 한 개의 선돌, 뒤편에 두 개의 선돌이 있는데, 뒤쪽 두 개의 장승 중 오른쪽 것은 원래 다른 마을에서 있던 것을 가져와 모신 것이라고 한다. 음력 정월 초사흘부터 집집마다 풍장을 치면서 지신을 밟아주고, 이때 탑서고청굴고사와 장승제를 위한 걸립을 한다. 유교식으로 모시는 탑고사와 장승제의 일반 절차는 다른 마을과 유사하다. 제의는 마을 입구, 곧 서고청 근처에 있는 장승을 먼저 위하고, 마을 뒤편에 있는 장승을 그 다음에 모시며, 마지막으로 탑할머니 고사를 지낸다.
선돌은 마을 앞 남쪽과 북쪽에 각각 위치하는데, 남쪽 선돌은 마을에서 300~400m 가량 떨어진 도로변 왼쪽 산 밑에 1기가 서 있다. 선돌의 형태는 직사각형의 돌기둥에 맨 윗부분은 정초에 옷을 입힌 한지와 왼새끼가 남아 있다. 크기는 높이 121㎝ 정도의 작은 규모로 정면에는 정사각형의 시멘트 제단(가로 89㎝×세로118㎝)이 설치되어 있다.
본래 남쪽 선돌은 이와 유사한 입석이 세워져 있었는데, 2004년에 훼손되어 다시 복원한 것이다. 북쪽 선돌은 짝으로 서있는데, 공암2리 수실로 통하는 길목에 있다. 2기의 선돌은 3m 간격을 두고 좌우로 서 있는데, 선돌머리에 역시 한지로 옷을 입히고 금줄을 쳤다.
[절차]
반포면 공암리의 탑제와 장승제는 매년 음력 정월 14일 초저녁에 제례를 모신다. 하지만 제를 앞두고 마을에 부정이 발생하거나 제관 등이 부정을 타면 음력 이월 초하루나 그 다음으로 제일을 연기한다. 부정에는 ‘출산’과 ‘초상’이 있지만, 근래에는 초상이 있을 때만을 부정으로 치고 제일을 연기한다.
탑제의 준비는 섣달 그믐 이전부터 시작되는데, 마을의 대청소를 시작으로 설을 앞두고 마을 사람들은 날을 잡아 동네 골목과 탑 주변을 깨끗이 청소한다. 그리고 음력 정월 초사흗날 공암리에서는 ‘거듬거지’라 하여 풍물패가 집집마다 지신을 밟아주며 걸립에 들어간다. 풍물패는 집안으로 들어가 터주굿-조왕굿-성주굿 등 지신밟기로 축원해주는데, 그 집에서는 술과 안주를 내고 곡식 등을 희사한다.
그러나 요즘은 호구수가 크게 늘고 예전 굿 소리를 하던 어른들이 세상을 떠나고 마을 이장과 몇몇 사람들이 풍물을 치고 들어가 돈을 추렴한다. 초삼일 걸립은 면사무소·반포지서·농협·초등학교·식당·다방 등 공암리의 유관기관과 상업에 종사하는 사람들이 모두 포함되고, 외지로 나간 마을 사람들이나 이웃 마을에서도 자진해서 탑제의 성금을 내는 사람이 많다고 한다.
당일 오후의 걸립이 끝나면 탑제를 주관하는 마을회의에서 50세 이상의 마을 사람을 대상으로 제관을 뽑는다. 제관은 제물을 준비하는 제주(祭主)와 헌작을 담당할 헌관(獻官)·축관(祝官)으로 구성된다. 가장 중요한 제주의 경우는 생기복덕(生氣福德)을 가려 따진다. 제관으로 뽑히면 곧바로 제주의 집에는 왼새끼를 꼬아 금줄을 치고 황토 세 무더기를 양쪽에 갖다 놓는다. 제주는 탑제를 마칠 때까지 매일 찬물로 목욕하고 정성을 드리는데, 바깥출입을 일정 금하고 비린 음식을 입에 대지 않는 등 금기를 엄하게 지킨다.
한편, 제관을 뽑은 이튿날 아침 제관의 부인은 찬물로 목욕을 하고, ‘술쌀’ 서 말로 제주(祭酒)를 빚는다. 예전에는 제관으로 선정되면 부정을 타지 않을까 걱정도 많았지만 한편으로는 자랑스러워했다. 근래에는 이러한 엄격한 금기로 제관을 서로 기피하는 경향이 있고, 마을 내의 교회가 크게 번성하며, 외지인이 마을에 많이 들어와 살게 되면서 제관을 뽑는 전통은 사라졌다. 1980년대부터는 이장이 의무적으로 초헌관이 되고, 나머지 헌관과 축관은 새마을지도자와 동회장이 역할을 분담하여 맡았다. 뿐만 아니라 제주를 빚는 일이나 제물(祭物)을 마련하는 일도 마을회관에서 나이가 많고 부정 없는 여자들에게 수당을 주고 맡긴다.
정월 12일부터는 탑제를 지내기 위해 이장과 동네 임원들이 유성장이나 대전 중앙시장에 가서 필요한 제물과 물품을 구입한다. 제수 물품은 최상품으로 구입하고 값을 흥정하지 않는다. 당일 오후에는 마을회관에 모여 왼새끼를 꼬아 탑할머니와 선돌에 금줄을 치고, 머릿돌과 선돌의 상부에 한지옷을 입힌다.
정월 14일 탑할머니와 선돌에 바칠 제물을 마련하느라 마을 사람들은 부산하다. 오전에는 전과 적을 준비하는데, 전은 명태전과 두부전을 쓰고, 적으로는 밀가루 반죽에 미역과 실파를 번갈아 얹은 ‘큰적’과 흔히 ‘동그랑땡’이라 부르는 육적을 마련한다. 오후에는 떡쌀을 방앗간에서 가루를 내어 제물로 바칠 백설기를 시루에 올린다. 그리고 탕(두부·무·북어)을 준비하고 삼색나물(무·고사리·시금치)을 준비한다. 마을 사람은 풍물을 점검하고, 이장과 동회장은 소지를 점검한다. 소지는 희사금을 낸 사람 이름을 올려주는데, 전날부터 적당한 크기로 자른 백지에 해당자 이름을 빠짐없이 적어둔다.
탑제는 저녁 7시에서 8시 사이에 시작되고 남쪽 선돌에서 북쪽 선돌로 이동하며 마지막으로 탑할머니 앞에서 제례를 올린다. 선돌 앞에서의 제례는 유교식으로 분향(焚香)-참신(參神)-강신(降神)-헌작(獻爵)-사신(辭神)-음복(飮福) 순으로 진행하며, 단작으로 술을 올리고 축문은 생략한다. 제관 일행이 제물을 차에 싣고 탑할머니가 있는 제장으로 들어오면 풍물패와 마을 사람들이 그 뒤를 따라간다.
탑 앞에 상석에는 떡시루를 먼저 올리고, 시루 위에 불밝이쌀을 담은 그릇을 놓고 초를 꽂는다. 진설이 완료되면 제관(이장)과 집사(동회장과 총무)는 좌정하고 이장이 향을 만지고 재배한다. 이어서 이장 옆의 집사가 잔을 건네고 술을 따른다. 이장이 잔을 건네면 탑 주변에 세 번 나누어 붓고, 잔을 제자리에 두면 이장과 마을 사람들은 모두 엎드려 재배한다. 이장은 다시 술을 받아 돌리고 집사가 술잔을 받아서 올린 뒤에, 메의 뚜껑을 열고 삽시(揷匙)한다. 이어서 축관의 독축(讀祝)이 있고, 제관과 마을 사람들은 모두 엎드려 있다가 축이 끝나면 자리에 일어난다.
마지막으로 이장 혼자 재배를 한다. 아헌(亞獻)은 동회장이 맡고, 종헌(終獻)은 새마을지도자가 맡는다. 초헌한 술은 퇴주그릇에 붓고 잔을 내려 아헌관에게 준다. 집사가 술을 따르면 그 술잔을 받아 메와 갱(羹) 사이에 둔다. 동회장이 재배를 하고 아헌 올린 술잔을 내려 퇴주그릇에 붓는다. 그러면 집사가 잔을 받아 제자리에 둔다. 종헌관이 이어 좌정하며 잔을 내려 술을 헌작한 후 재배하고 물러난다.
이렇게 삼헌작(三獻酌)을 마치면 초헌관인 이장이 엎드려 술잔을 받고 술을 따르면 세 번 돌린 후 집사에게 술을 준다. 집사가 그 술잔에 조금씩 술을 부어 첨작하고 이장은 곧 재배한다. 다음으로 갱(羹)을 다른 빈 그릇에 갈고 물을 붓는다. 축관이 밥을 세 번 떠서 물에 말고, 탑제에 참석한 마을 사람이 부복(仆伏)한다. 축관이 기침을 하면 모두 일어나고, 축관이 시저를 바로 하고 제관을 비롯한 모든 사람이 재배하여 사신(辭神)한다.
탑제의 마지막으로 소지를 올리는데, 먼저 제관이 마을의 무사태평을 기원하는 대동소지를 올리고 나중에 개인소지를 올린다. 개인소지는 탑제를 위해 희사금을 낸 사람을 올린다. 탑제에 참석한 사람을 호명하는 순서에 소지종이를 받아서 자신이 직접 소지를 오린다. 소지를 마치면 제관과 참석한 마을 사람들은 술과 제수로 올린 음식을 음복하고 아울러 탑 꼭대기 금줄에 북어를 꽂고 제물과 떡을 떼어 던진다.
[축문]
‘단군기원 ○○○○년 ○○정월 십사일 정성 올리는 자 ○○○ 감히 고하나이다. 동신보살(洞神菩薩) 님전 오랜 세월 그 옛날 정성을 다해 탑을 모아 제사를 올리며 동민일심동체 엎드려 기원하나이다. 탑 할머니시여 강림하옵소서. 삼가 비옵건대 질병이 없이 건강하고 육축이 번성하여 오곡이 잘 여물고 서로서로 화목하며 관재 및 구설을 바람에 날리시고 경영하는 일마다 영원히 번창영하고 모든 행운 주시기를 간절히 바라오며 삼가 간소한 제수를 정성껏 드리니 흠향하소서(維歲次于支正月于支朔十四日于支 獻誠薺者 洞民一同 敢昭告于 洞神之前 日畇歟古 塔閱百匪 神兮至靈 降之恩成 群誠伏禱 其應如欺 護我一同 掃除疾病 六畜繁殉 五穀登豊 神明所于 各得人和 官災雲散 口舌風飛 淸酌庶差 洋洋威應 百福斯亭 永賴神憲 尙 饗).’
[부대행사]
마을 탑제가 모두 끝나면 제주 집에 모여 놀이마당을 벌인다. 아이들에게 제사에 올렸던 떡을 먹이면 좋다고 하여 아이들에게 떡을 나누어준다.
[현황]
충청남도 공주시 반포면 공암리는 마을 부근 도로변 산자락에 동굴 입구와 같은 큰 바위 구멍이 있는데, 공암리의 지명 연원은 그것과 관련 된다. 마을 오른쪽 천변에 매우 오래된 팽나무가 있는데, 그 옆에 할머니탑이 있다. 이 마을 사람들은 이 ‘탑할머니’가 마을을 수호한다고 마을 사람들은 굳게 믿고 있으며, 매년 정월 십사일 저녁에 정성껏 제물을 준비하여 제사를 올린다. 이후, 마을은 매년 마을을 지켜주는 묘탑을 ‘탑할머니’라고 칭하고 지금까지 마을신으로 모시고 정성껏 제를 올리고 있다는 것이다.
탑제와 장승제는 매년 음력 정월 14일 저녁 7시에서 8시 사이에 시작되고, 남쪽 선돌에서 북쪽 선돌로 이동하며 마지막으로 탑할머니 앞에서 제례를 올린다. 제례는 유교식으로 분향(焚香)-참신(參神)-강신(降神)-헌작(獻爵)-사신(辭神)-음복(飮福) 순으로 진행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