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170209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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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石松里燈-同火祭 |
영어의미역 | Village Tutelary Festival of Seoksong-ri |
분야 | 생활·민속/민속,문화유산/무형 유산 |
유형 | 의례/제 |
지역 | 충청남도 공주시 정안면 석송리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조훈성 |
성격 | 등불 축제|마을 제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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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례시기/일시 | 음력 1월 14~15일 |
의례장소 | 석송리 마을 |
[정의]
충청남도 공주시 정안면 석송리에서 음력 정월 열 나흩날부터 보름날까지 지낸 마을 제.
[개설]
충청남도 공주시 정안면 석송리에서는 음력 정월 보름 전날부터 보름까지 등불동화제가 있었다. 석송 등불 동화제는 원래는 북계리와 함께 치렀던 마을 제(祭)였다고 한다. 지금은 행정구역상 석송리와 북계리가 분리된 마을이지만, 예전에는 하나의 마을권역으로 함께 등불동화제를 함께 치렀다.
[연원 및 변천]
석송리 등불동화제는 석송리만의 동화제가 아니라, 원래는 석송리의 남쪽 마을인 북계리와 함께 치렀던 마을 제(祭)였다. 정월 대보름에 석송리와 북계리가 도로변과 농로(農路)에 서로 줄을 치고 등불을 다는 풍속이 6·25전쟁 때까지도 지속되었다고 한다. 동화제는 마을의 길목에 등불을 매달아 마을과 집안의 길흉화복을 점치고, 평안과 안녕을 기원하는 자리였다. 어느 마을의 등불이 오래 켜져 있는가를 비교해 그 해 농사의 풍흉을 점치기도 했다. 등불동화제는 일제강점기 말 5~6년을 제외하고 꾸준히 행사가 진행되었는데, 6·25전쟁 때 석송리 안말 사람들이 많이 죽어 동화제의 영험이 없다고 그만두게 되었다.
[절차]
석송리 등불동화제는 다음과 같은 절차를 가졌다. 동화제의 준비는 전년도 12월 중순에 마을 대동계에서 풍물을 치고 걸립을 돌며 등을 만들 날을 정하는 데서 시작되었다. 정월 초이레가 되면 마을 전체를 풍물을 치며 걸립을 했다. 걸립은 길나래비(풍물 앞잡이)인 대동계장, 풍물꾼(상쇠, 부쇠, 북, 장고, 징), 마을 장정 4~5인(곡물과 재화를 받는 사람)이 중심이 되어 마을을 돌았다. 걸립은 걸립패가 마을 사람의 집에 들어가 안택굿을 해주고 놀아주면 집 주인이 동화제에 쓰일 곡식과 재화, 짚을 내놓았다. 풍물패가 마당, 부엌, 곡식창고, 장독, 우물 순으로 축원굿을 해주고 주인은 함지박에 쌀을 담아 촛불을 꽂아 상 위에 올렸다.
이렇게 걸립해서 모은 재화가 보통 백미 4~5가마니가 되었고, 동화불을 지를 짚단은 대개 한 집에서 내놓았다. 등(燈)은 정월 12~13일 사이에 마을회관이나 집에서 만들었다. 등을 만들기 위해서 먼저 재료를 준비했는데, 송판(20×20㎝)·철사(대신 싸리나무를 사용하기도 함)·창호지·새끼 등을 준비하고, 등의 크기와 모양은 저마다 다양하게 만들었다.
우선, 십자(+)형의 나무판자 네 귀에 철사를 뽑아 올려 등의 틀을 잡는다. 그리고 거기에 한지를 발라 바른 후, 판자 중심부에 못을 박았다. 1920년대 이전에는 싸리나무와 대나무를 이용해 수박등을 만드는 경우가 많았고, 이후 철사를 이용하기 시작하면서 마을에서 공동으로 등을 만들었다.
13일 오후 5시경이 되면 말뚝을 박고 줄을 달 준비를 한다. 줄은 석송리의 경우 국도변의 신흥리 뒤 고개턱에서 화봉 경계 고갯마루 서낭당까지, 북계리는 마을 앞 삼두사(三頭蛇) 바위 밑에서 현재의 북계1리 남단 마을 끝까지 등을 달았다. 말뚝의 길이는 1m 50㎝ 정도에 그 숫자가 100여 개였는데, 마을 짚불은 석송리의 경우 안말 회관 앞 공터이고, 북계리는 북촌 앞 공터였다. 이곳에서 각 마을의 농기(農旗)를 세우고, 장대 끝에 새끼를 8~10개 묶어서 등을 단다. 일제강점기 때는 회관에 국기게양대를 세워서 게양대에 새끼를 매고 동네 등을 달았다고 한다.
정월 14일 오후가 되면, 마을 풍물패의 풍물 난장으로 본격적인 동화제가 시작된다. 석송리는 남쪽에서 북쪽으로, 북계리는 북쪽에서 남쪽으로 등을 달았다. 이때 짚단 300여 단을 한 동이로 묶어세우고 촛불을 켜놓은 등불을 매달게 되고, 마을 사람들은 풍물패와 어울려 즐겁게 춤을 추고 노래를 부르면서 놀았다. 밤 11시에서 새벽 1시쯤 집집마다 제물을 가지고 나와 각자의 개인 등 앞에서 한 해의 평안을 기원하는 고사와 소지를 올렸다. 집안에 걱정거리가 많은 집은 무당을 불러 굿을 하기도 하였다.
정월 보름날 날이 밝으면 마을의 젊은이들은 몰래 상대 마을 등불이 있는 곳에 가서 등불을 맨 줄을 흔들어댔다. 그래서 상대 마을의 등불을 먼저 떨어뜨려 꺼지게 하려 했던 것이다. 이렇게 해서 등불을 지킨 쪽과 등불을 지키지 못한 쪽은 명암이 갈린다. 등불을 일찍 태운 마을은 집단적으로 상대 마을에 가서 항의하며 등불을 몰래 꺼뜨린 사람을 내놓으라고 한다. 하지만 이긴 마을은 여러 사유를 대며 알려주지 않아서 마을 싸움으로 번지기도 했다고 한다.
등불동화제 뒤풀이는 자정 이후에 이루어진다. 대보름에 잠을 자면 눈썹이 센다는 말도 있고, 동화제를 벌이면서 어느 마을 등불이 오래 가는가를 두고 풍흉을 믿었으므로 마을에서는 밤새 뒤풀이가 계속되었다고 한다. 다음날 아침 10시경 등불을 떼면 행사를 마치게 되었다.
[현황]
마을의 제의는 마을의 풍요와 무사안녕을 기원하고자 마련된다. 공주시 정안군 석송리의 등불동화제는 그런 면에서 다른 특별한 일면이 있다. 석송리 사람들은 다른 마을의 장승제나 산신제의 모습과 달리 등불동화제라는 제의를 마련했고, 이를 전승했다는 것이다. 마을의 등불을 통해 마을의 풍요와 안녕을 기원하면서 마을의 대동단결의 장을 마련하고 결속을 다졌다는 것도 의의가 있고, 제의의 엄숙성을 넘어서 떠들썩한 마을잔치를 마련하여 새로운 한 해를 준비하고자 했다. 대동놀이적 성격이 강했다고 할 수 있는데, 이제는 이러한 전통의 맥이 끊어져 아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