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170210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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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新永里-長丞祭 |
영어의미역 | Guardian Post Religious Service of Sinyoung-ri Jinbat Village |
분야 | 생활·민속/민속,문화유산/무형 유산 |
유형 | 의례/제 |
지역 | 충청남도 공주시 사곡면 신영리 |
집필자 | 최정숙 |
성격 | 장승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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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례시기/일시 | 음력 1월 14일~15일 |
의례장소 | 충청남도 공주시 사곡면 신영리 진밭 |
신당/신체 | 장승 |
[정의]
충청남도 공주시 사곡면 신영리 진밭에서 정월 열 나흗날 마을의 안녕과 풍요를 기원하고자 지내는 마을 제사.
[개설]
신영리의 역사를 살펴보면 인구 변화 등으로 말미암아 마을의 분화에 따라 진밭 일대는 신영리로, 마상골 일대는 신영2리로, 안영리 일대는 신영3리로 각각 나뉘게 되었다. 사곡면 신영1리는 사곡면 면사무소 소재지인 호계리의 남쪽에 접한 마을로, 사곡면 면사무소에서 국도 32호선을 따라 남쪽으로 3.5㎞ 정도 거리를 가면 오른쪽으로 마을 입구가 있다.
신영1리의 동쪽은 유구천을 경계로 화월2리 새들과 접해 있고, 서쪽은 무재와 팔봉산 줄기를 따라 우성면 봉현리와 접해 있다. 남쪽은 황새 머리산을 지나 신영2리 마상골로 이어지고, 서북쪽으로는 신풍면 선학리 버신이 고개와 영정리 마새, 북쪽으로는 두리봉 산자락을 경계로 해월리 산수골, 호계2리 황골, 북동쪽은 호계2리 남두머리와 당마루산에 접하고 있다.
사곡면은 산지가 많아 농토가 넓게 펼쳐진 곳을 찾아보기가 거의 어렵다. 그 때문에 사곡면 사람들은 좁은 골짜기마다 작은 마을을 형성하며 살아왔는데, 신영1리도 역시 마찬가지로 좁은 골짜기에 마을이 기대어 있는 산골 마을이다.
사곡면 사람들에게는 신영1리는 진밭으로 통한다. 모래가 많아 농사가 잘 안되어 보람이 없다는 뜻으로 살강논이라 부르며, 모내기철에 비가 제대로 오지 않으면 모내기를 할 수 없는 하늘바라기 논이 많았다. 그래서 이 논에서는 하지에서 소시 때는 되어야 모내기를 하였고, 이마저 여의치 않을 때는 모 대신 조나 메밀 등을 대신 심었는데, 완전한 밭도 아니고 논도 아닌 곳이라 호미로 김을 매면 달라붙는 축축한 밭이라 하여 진밭이라 불렸다고 한다.
그래서 예로부터 진밭 들에 모를 다 심으면 공주 모가 끝났다고 하는 웃지 못 할 우스갯소리도 있었다고 한다. 한편으로는 진밭의 논은 천수답인 관계로 한때는 진밭 들 전체가 보리를 심어 사곡면의 보리 매상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잎담배 농사도 성행했으나 지금 마을 위쪽에 작은 저수지와 유구천 물을 끌어올려 쓰는 대형양수장이 있어 전천후 수리시설을 갖추고 있다.
얼마 전에는 마을 앞을 지나는 도로공사를 맡은 인부가 장비를 잘못 다루어 실수로 장승의 목을 부러뜨린 일이 있었다고 한다. 그런데 갑자기 이때부터 차가 움직이지 않아 공사를 진행할 수가 없었다고 한다. 마을 사람들은 장승이 노한 것이라고 하여 제사를 지내고 장승을 새로 세워 달라고 하였다. 그러나 마침 알맞은 돌이 없어 새로 장승을 세우지는 못하고 돌은 때워 놓기만 하고, 제사를 지내주었는데 이때부터 이상하게도 이 길가에 교통사고가 자주 난다고 한다.
예로부터 물이 귀했던 신영1리에서는 비가 안 올 때면 마을 중앙을 흐르는 개울과 정자나무와 빨래터에서 기우제를 지냈는데, 이때는 제사를 지내고 저녁때면 부녀자들이 나와 물장난을 치면서 비가 오기를 기원했다고 한다. 이 밖에도 각 집안에서는 왕신단지를 모시는 등 부대행사가 존재했으나 이후 많이 사라졌으며 지금은 한 집 정도만이 그 명맥을 이어나가고 있었다고 한다.
[신당/신체의 형태]
장승은 선돌형으로 마을로 들어오는 도로의 양편에 위치한다. 장승에는 각각 ‘동방청제대장군(東方靑帝大將軍)’, ‘서방백제대장군(西方白帝大將軍)’이라는 명문을 새겨 놓았다. 장승 제작은 석수장이 감참봉이 맡았다고 전해진다. 장승은 본래 나무로 해마다 깎아 세웠는데, 1948년 즈음에 돌장승으로 바꾸었다. 산에서 자연석을 구해다가 명문(銘文)을 새겨서 나무 장승을 뽑아낸 자리에 세웠다. 돌장승을 세우면서 나무 장승과 함께 깎아 모셨던 솟대도 사라졌다.
[연원 및 변천]
신영1리에서는 매년 정월 열 나흗날 저녁 12시에 풍년과 질병 방지를 기원하는 장승제를 지내고 있다. 더불어 이 장승제는 마을 앞 큰길가에 세워져 길을 지나는 사람들의 안녕을 비는 노신제의 기능도 함께 하고 있다. 장승은 사곡면과 우성면을 잇는 국도 32호선 도로 변 좌우측에 서로 마주 보게 세워 두었으며, 각각 높이 150㎝, 폭 60㎝, 두께 30㎝ 정도로 비슷한 크기이다.
1930년대까지는 원래 마을 입구에 나무로 만든 장승과 솟대를 모셨으나, 해마다 나무를 깎아 모시는 것이 어려워져 아예 적당한 크기의 길쭉한 돌을 구해다 장승을 모셨다고 한다.
[절차]
신영리 진밭 장승제의 주관 조직은 역시 마을 대동계에서 관장하고 있으며, 생기복덕을 따져 제관을 정하는데 옛날에는 제관이 되면 반드시 찬물에 목욕하고 제를 올렸으나 지금은 꼭 그리하지 않는다. 또 옛날에는 노신제를 지내기 일주일 전에 마을 입구에 금줄을 쳐 부정을 막았고, 제례 음식은 젊은 여자들이 없는 집에서 차려졌다.
그러나 이제는 장승의 모습뿐만 아니라 장승제의 과정에도 많은 변화가 생겼다. 생기복덕이 닿아 제관으로 지목되어도, 이를 거부하고 제사에 참여하지 않는 경우가 많아졌다. 심한 경우에는 동계장과 이장만이 노신제에 참여하기도 했다. 2000년대부터는 제관 선출도 아예 하지 않고, 동계장이 제사를 맡아서 치른다. 근래에는 마을 사람 중 부정하지 않으면 누구라도 제의에 참여할 수 있다.
예전에는 제물로 소족[牛足]을 사용했으나, 비용이 많이 들어 요즘은 돼지고기를 사용한다. 값이 저렴할 경우에는 소족을 올리기도 한다. 그 외의 제물은 백무리, 술 등을 마련한다. 특히 제사를 지낼 때는 항상 마을에서 묵을 준비하는데, 묵은 메밀묵이 아니면 쓰지 않는다고 한다. 이는 도로를 지키는 도로귀신이 메밀묵을 좋아하기 때문이라고 한다.
정월 열 나흗날 자정이 되면 제관들은 목욕재계하고 제장으로 향한다. 예전에는 차량의 소통이 많지 않았기 때문에 양쪽 장승의 가운데에 백지를 깔고 제물을 진설했다. 근래에는 차량의 소통이 많아져서 어느 쪽이든 한쪽에 상을 차리고 제사를 올린다. 장승제는 유교식 정숙형 제의 형태로 진행되며, 소지 올리기를 마지막으로 모든 제의 절차가 끝이 난다. 장승제 후에는 장승 앞에 짚을 일자로 깔고 제물을 약간씩 떼어놓으며, 잡귀잡신을 위한 몫도 사방에 조금씩 뿌린다. 장승 앞에 놓인 제물을 먹으면 한해 재수가 좋다고 하여 서로 가져가기도 한다. 제사가 끝난 이후에는 마을 사람들이 모여서 윷놀이를 하는 등 잔치를 벌인다.
[축문]
복이 축왈 천지 신명은 감응강신 하소서/ 달로 칠월이요 날로는 열아흐래/ 일진은 계축이린 이옵고 우리 동중 각인각성 집집마다 오늘 정성을 드리오니/ 반가이 흠향 즐거이 응감 하소서 우리 동중 입은 덕도 많거니와/ 금년 일년 열두달 삼백 육십 오일이 오고 갈지라도/ 삼재팔난 관재구설 근심걱정 우환가환을 외주월강 천리로 소멸 하시어/ 소망 성취 만사대통 점재 점재 하옵시제 부귀공명 축원이라/ 발원 축원 소원대로 마을 물이 맑고 집집마다 불이 밝아 수화정명 점지 될재/ 명당뜰엔 옥이 돋고 옥당뜰엔 명이 돋아 달뜬 광명 땅으로 점지점지 하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