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170214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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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塔山山神祭 |
영어의미역 | Religious Service for the Mountain God of Tapsan Village |
분야 | 생활·민속/민속,문화유산/무형 유산 |
유형 | 의례/제 |
지역 | 충청남도 공주시 유구읍 탑곡리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최정숙 |
성격 | 산신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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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례시기/일시 | 음력 1월 5일 |
의례장소 | 유구읍 탑곡리 마을 뒷산 |
신당/신체 | 마을 뒷산의 정상 부근|호랑이 |
[정의]
충청남도 공주시 유구읍 탑곡리 탑산에서 음력 정월 초닷새에 지낸 마을 제사.
[개설]
탑곡리 탑산 산신제는 예부터 지내오던 마을 제사였으나 지금은 지내지 않고 있다. 언제부터 지내지 않았는지 정확히 알 수 없으나 읍사무소 관계자, 탑산 이장, 나이 많은 마을 어른들도 산신제를 잘 모르는 것으로 보아 꽤 오래전에 없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신당/신체의 형태]
탑곡리 탑산 산신제의 신당은 마을 뒷산의 정상 부근에 자리한다. 당집은 초가 한 칸이며, 안에 제기를 보관했다. 탑산에서 위하는 산신은 호랑이라고 한다. 산신제가 없어진 이후 제당에 있던 중요한 자료는 마곡사로 옮겨졌다.
[절차]
탑곡리 탑산 산신제는 매년 음력 정월 스무날 안에 길일을 택하여 지냈는데, 대개는 초닷새를 제일(祭日)로 정했다. 산제에 앞서 정월 초하루에 먼저 제관(祭官)을 선정했는데, 집안에 초상이나 해산 등 부정한 일이 없는 모범 주민 중에서 결정했다. 제관은 20세 이상 70세 미만의 기혼자로 정했고, 제관·축관·주당으로 모두 세 명을 선출했다.
제관은 제사를 주도하고, 축관은 축문을 읽었으며, 주당은 뒷간을 지켰다. 제관으로 선정된 그날부터 대문에 금줄을 드리우고, 대문 앞 좌우에 황토를 놓아 부정한 사람과 잡인의 출입을 금했다. 또한 자신의 외출을 삼가고 성생활을 금하는 등 금기생활에 들어갔다.
제물(祭物)의 비용은 마을 기금으로 충당했다. 제비가 마련되면 돼지고기, 삼색실과, 떡, 메, 술 등의 제물을 장만했다. 과거에는 쇠고기를 올렸지만, 나중에는 돼지고기를 대신 놓았다고 한다. 산신제는 조용한 가운데 밤에 마을 대표들이 모여 제물을 올리고 절하고 축문을 읽거나 비손을 한 뒤 소지를 올리는 유교식으로 치렀다. 산제사가 끝나면 농악대와 더불어 흥겨운 놀이를 벌였고, 큰 노송(老松) 앞에 가서 서낭제를 올렸다.
[축문]
“○○년 4월 ○○삭 15일 ○○ …… ○○○이 ○○○ 산신님께 아뢰옵니다. 엎드려 생각하건대 존령님은 저희 ○○땅에 있어서 종요로운 자리에 계시오며, 저희들을 보살피고 도와주시옵니다. 비바람을 조절하시어 풍년이 들게 하심과 악을 제거하시고 재앙을 물리치시는 이 모두가 존령님의 공이 아닌 것이 없습니다. 오래도록 제사를 받들어 복을 빌기를 그치지 아니하여 삼가 마련한 제물로 공경을 다하여 정성껏 올리오니 흠향하옵소서(維歲次 ○○年四月○○朔十五日○○……○○○敢昭告于○○○山神之神 伏惟尊靈 重鎭○○ 保佑我人 罔非神功 出雲興雨 除惡去災 言報祀求福不回 謹以凊酌 脯醯祗薦 于神 尙 響).”
[부대행사]
탑곡리 탑산 산신제가 끝나고 나면 제사음식을 나누어 음복을 하면서 농악대와 더불어 흥겨운 놀이로 마을 주민의 화합을 다졌다. 탑산에 전승되는 산신제는 종교적인 것뿐만 아니라, 제사를 통해 마을 주민들이 단합하는 기능을 지녔다고 볼 수 있다. 또한 마을회의를 하여 종교적 일체감을 생활로 연결시켰는데, 마을회의에서는 마을 운영과 관련된 제반 사항들을 함께 의논했다고 한다.
[현황]
탑곡리 탑산에서는 지금은 산신제를 지내지 않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