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1702640 |
---|---|
한자 | 要龍里-祭 |
영어의미역 | Tutelary Festival in Oryong-ri |
분야 | 생활·민속/민속,문화유산/무형 유산 |
유형 | 의례/제 |
지역 | 충청남도 공주시 의당면 요룡리 두만이고개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이걸재 |
성격 | 대동 서낭고사|마을 제사 |
---|---|
의례시기/일시 | 음력 1월 14일 |
의례장소 | 요룡리 두만이고개 |
신당/신체 | 서낭당 |
[정의]
충청남도 공주시 의당면 요룡리에서 음력 정월 대보름에 지내는 마을 제사.
[개설]
충청남도 공주시에는 많은 서낭제가 올려졌으나, 제3공화국 시절 새마을운동이 시작되면서 실시한 미신타파에 상징적인 대상이 되어 서낭당의 돌무지들이 대부분 사라졌다. 따라서 마을 단위로 올리던 서낭제들도 모두 사라지고, 오직 의당면 요룡리만 마을고사로 서낭제를 올린다.
요룡리 서낭제는 민속 신앙으로의 인적인 서낭제와 마을 공동의 대동 서낭제 두 종류가 있다. 여기서는 마을 공동의 제사로서의 서낭제를 설명하고자 한다. 요룡리 서낭제의 특이한 점은 이 마을의 가정 서낭제처럼 여인들이 주가 되는 의식을 가지고 있어서, 남자는 빠져도 흉이 되지 않지만 여인들이 빠지면 안 되는 것으로 알았다.
정월 초사흘부터 가정의 서낭제가 올려지기 시작하여 정월 열나흘이 되면 특별한 이유로 보름날 지내는 가정을 제외한 모든 가정에서 서낭제를 올리고, 열나흘 아침이면 대동 서낭제를 위한 고사장 준비에 들어가기 때문에 대부분 이날은 마을 고사만 올려지는 형태였다.
[연원 및 변천]
요룡리 서낭제는 예부터 시행되어오다가 1970년대 전반 박정희 정권 시절에 ‘미신타파’라는 명분에 걸려 대동 서낭제는 중단되고, 개인 서낭제만 치러졌다. 그러다가 서낭을 모시지 않고부터 마을 젊은이들이 너무 많이 죽는다 하여 2002년부터 다시 대동 서낭제가 부활되었다.
[신당/신체의 형태]
신당은 요룡리와 두만리를 잇는 두만이고개 마루에 설치된 서낭당이다. 1980년대에 이 고개를 낮추는 작업이 이루어져 현재의 서낭당은 옛 서낭당의 위치에서 7~8m 낮은 고개가 되었지만, 지금도 마을 사람들은 옛 서낭당 터에 오색 천을 두르고 제를 지낸다. 옛날 서낭당에는 다른 마을의 서낭당과 달리 참나무 서낭목이 있었다고 한다. 서낭목 아래 좌우에는 마을 사람들이 고개를 넘으면서 기원을 담아 올려놓던 돌무더기가 좌우에 각각 4~5m의 둘레, 2~3m 높이로 형성되었다. 2002년 이후에는 느티나무를 서낭목으로 심고 돌무지는 없어졌다.
[절차]
요룡리 서낭제는 먼저 유사를 결정하는 것에서 시작된다. 정월 초사흗날 마을에서 동민들의 생기복덕(生氣福德)을 가려 그 해 고사의 제주(祭主)에 해당하는 유사를 선출하고, 고사의 규모와 절차를 논의한다. 논의사항 중 비선자를 선정하고, 비선자가 정하는 내용에 따라 준비에 착수한다.
요룡리에서 서낭당고사를 가장 많이 주관하는 사람은 요룡리 주민 유왕종으로, 요룡리의 서낭제나 요골 샘고사에 관하여 가장 많이 알고 있으며, 무속인에 가까운 고사 진행 능력을 갖추고 있다. 정월 7~10일에는 부녀자들이 걸립을 통해 모은 것을 마을회관으로 가지고 모인다. 이것을 가지고 장을 보는데, 장에 나가서는 절대 가격을 깎지 않고 필요한 물품을 사온다.
정월 14일 오전 9~10시 경에 장정들은 서낭당에 올라가 주변을 소제하고 정리한 후 천을 둘러 고사장을 준비한다. 정월 초사흘부터 가정별로 개인적인 서낭제가 계속되어 설치된 갖가지 물품 중 그대로 둘 것은 정리해두고, 치울 것을 치우는 작업 형태이다. 부인들은 마을회관에 모여 제사 음식과 제사 이후 마을 사람들이 함께 먹고 마실 음식을 준비한다.
오후 3~5시 경에는 고사장으로 이동하는데, 이동하는 순서는 유사, 법사, 풍장꾼, 제수, 마을 사람들 순이다. 이동하는 중에는 길군악(느리고 단조롭게 연주하는 굿거리 풍장가락)을 연주하는데 춤을 추지는 못한다. 오후 5시에 법사가 의도하는 것을 제주가 진설하며, 마을의 아낙네들이 이를 도와서 시행한다. 다음으로 강신헌작(降神獻爵), 즉 유사가 첫잔을 올리고 마을 동민 모두가 네 번 큰절을 올리는 절차가 진행된다.
다음으로 무당 또는 그 능력자가 마을 전체의 안녕과 평화 동민의 행복을 비는 비선 과정이 이루어지는데, 서낭제의 가장 중요한 절차라고 할 수 있다. 비선이라는 말은 요룡리 서낭제에서만 사용하는 용어이다. 정(앉은굿의 경문)을 읽고 기원을 비는 행위와, 무당이 마을의 기원을 경문과 함께 외어나가면 참여한 모든 주민들이 함께 비는 행동을 ‘비선한다’라고 표현한다.
이때의 무당을 ‘비선하는 사람’이라고 표현하는데 공경하는 표현이다. 비선의 절차는 충청남도 일원의 앉은굿과 유사하면서도 단조롭다. 경문 중 ‘부정풀이’를 길지 않게 하고, 마을의 안택을 빈다. 이런 이유로 마을의 안녕을 비는 절차까지는 일반 굿과 달리 단조롭고 평온하게 이어진다.
비선이 끝나면 복을 빌기 위해서 하늘을 향해 종이를 태워 올리는 소지(燒紙) 의식이 진행되고, 이어 고사의 마지막 절차로 사방 고시례인 푸레박질이 이루어진다. 푸레박질은 음식, 특히 떡을 중심으로 갖가지 음식을 조금씩 덜어내어 바가지에 담고, 서낭목을 중심으로 동, 서, 남, 북 네 곳을 다니며 수비에게 나누어주는(땅에 버린다) 행위이다. 마지막으로 서낭당에 불을 놓아 양기를 불러 1년 동안 밝은 기운으로 서낭당을 지켜달라는 염원을 담아놓는 화톳불을 지핀다.
지금은 행해지지 않는 절차로 풍장고사가 있었는데, 소리마당으로 화톳불 주변을 돌며 풍장을 치던 풍장잽이들이 고사상 앞으로 와서 춤 장단 세마치의 풍장을 울리며 고사덕담을 하던 것이었다. 고사가 끝나면 풍장을 치며 복을 나누는 음복(飮福)의 절차를 거친다. 산에서 복떡이나 음복술을 마시지 못한 사람들에게는 이를 시행하고 마을 사람들이 함께 모여 노는 마당이 이루어진다.
[부대행사]
2002년 대동 서낭제가 부활된 이후 부대행사로 음력 1월 14~15일에 마을 경로잔치를 개최하고 있으며, 음력 1월 15일에는 모든 주민이 모여 윷놀이 대회를 한다.
[현황]
요룡리 서낭제는 매년 음력 정월 14일에 절차 가운데 풍장고사의 고사 덕담 부분을 제외한 모든 절차가 지금도 이루어진다. 옛 모습과 다소 변화되었지만 공주시에서는 유일하게 치러지는 대동 서낭제이며, 특히 유교와 무가의 절충형이라는 특징을 가지고 있어 귀중한 민속자료가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