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290093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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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李泳魯 |
영어음역 | Yi Yeongro |
분야 |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
유형 | 인물/의병·독립운동가 |
지역 | 경상북도 고령군 다산면 상곡리 465[상곡5길 7]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집필자 | 권대웅 |
성격 | 독립운동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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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신지 | 경상북도 고령군 다산면 상곡리 465[상곡5길 7] |
성별 | 남 |
생년 | 1884년 |
몰년 | 1937년 |
[정의]
일제강점기 고령 출신의 독립운동가.
[개설]
이영로(李泳魯)[1884~1937]는 지금의 고령군 다산면 상곡리에서 태어났다. 세칭 파리장서사건이라고 하는 제1차 유림단 의거는 서울에서 김창숙(金昌淑)·김정호(金丁鎬)·이중업(李中業)·유준근(柳濬根)·유진태(兪鎭泰)·윤중수(尹中洙) 등의 논의 끝에 시작되었고, 김창숙이 그의 스승 곽종석(郭鍾錫)을 만나면서 급진전되었다. 마침 충청남도 지역에서도 같은 일이 추진되고 있다는 사실이 알려져, 그 지역 유림의 거두인 김복한(金福漢)과 그 계열의 인물들이 합류하면서 두 지역 대표를 비롯하여 137명이 서명한 독립청원서를 작성하였다.
독립청원서는 일제가 자행한 명성황후 시해와 고종의 시해 의도, 그리고 한국 주권의 찬탈 과정을 폭로하면서 독립의 당위성을 주장하는 내용이었다. 김창숙은 3월 말에 독립청원서를 지니고 중국 상하이[上海]로 가서 번역과 인쇄를 한 뒤 신한청년당(新韓靑年黨) 대표로 파리에 가 있던 김규식(金奎植)에게 보내고, 국내의 각 향교에도 우송하였다. 그런데 이 일은 경상북도 성주의 만세 운동과 관련하여 1919년 4월 12일 서명자의 한 사람이었던 송회근(宋晦根)이 체포되면서 발각되었다.
[활동사항]
이영로는 1919년 3월 파리강화회의에 한국의 독립을 호소하기 위하여 김창숙 등이 유림 대표로 작성한 독립청원서에 서명하는 등 항일 운동을 전개하였다. 사건의 전모가 드러나면서 체포되어 구속되었으나 기소유예 처분을 받고 풀려났다. 그 후 1926년 군자금을 모금하기 위해 중국에서 다시 밀입국하여 활동을 벌이던 김창숙을 대구에서 만나 군자금 모집에 가담하였다.
당시 김창숙은 내몽골 지방의 미간지와 황무지 20만 정보[약 1,983㎢]를 매입한 뒤 이상촌(理想村)을 건설할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즉 만주 지역의 한인들을 집결시켜 개간 사업을 일으키고, 그 수입금으로 무관학교(武官學校)를 설립한 뒤 군대를 양성하는 둔병식(屯兵式) 제도를 시행하여 10년 동안 실력 양성을 통해 독립을 달성한다는 포부를 지니고 있었다.
이리하여 이영로는 경상남도 밀양의 부호 허석(許石)에게 출자를 요구하는 편지를 전달하고 군자금 100원을 받아 김창숙에게 전달하였다가 발각되어 체포되었다. 이 사건이 제2차 유림단 의거이다. 이 사건으로 징역 8개월에 집행유예 2년을 받았다.
[상훈과 추모]
1995년 건국포장이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