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1200588 |
---|---|
한자 | 凰顙洞 |
영어음역 | Hwangsang-dong |
이칭/별칭 | 봉상동 |
분야 | 지리/인문 지리 |
유형 | 지명/행정 지명과 마을 |
지역 | 경상북도 구미시 황상동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윤향림 |
[정의]
경상북도 구미시에 속하는 법정동.
[명칭유래]
인동 8경 가운데 2경과 3경인 봉두조하(鳳頭朝霞), 황상숙무(凰桑宿霧)에서 따서 봉상동(鳳桑洞)이라 하였다. 행정상 명칭은 황상동(黃桑洞)으로 황상산(黃桑山) 밑에 있어 붙여진 이름이다. 2013년 1월 16일 구미시 고시 제2013-11호에 의해 한자 지명을 황상동(凰顙洞)으로 변경하여, 일제 강점기 왜곡되었던 명칭을 원래 지명으로 복원하였다. 자연마을로는 어은곡(魚隱谷), 새터, 검성골[儉城谷, 일명 금성골] 등이 있다. 어은곡은 옛날 오래된 못에 큰 고기가 숨어 있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어운곡(御雲谷)이라고도 하는데 유래는 확실하지 않다.
새터는 100여 년 전에 형성된 마을로, 구미시 승격과 더불어 마을 주변의 일부가 주택 단지로 개발되어 새로 마을이 형성되었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검성골은 천생산성(해발 407m) 주위에 있는 마을로, 주민들이 항상 검소하게 생활하였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또는 임진왜란 때 홍의장군 곽재우가 진을 치고 왜군과 싸울 때 왜군이 꺼멓게 몰려 온 데서 유래한다는 설, 임진왜란 때 왜군의 시체가 널려 있었다 하여 그먼골로 칭하다가 검성골로 변하였다는 설, 일제 강점기에 금광을 채굴하였기 때문에 금성골이라 하였다는 설 등도 있다.
[형성 및 변천]
조선 후기 인동군 읍내면(邑內面)에 속하였다가 1914년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교동(校洞) 일부를 병합하여 황상리라 하고 칠곡군 인동면에 편입하였다. 1978년 구미읍과 칠곡군 인동면이 구미시로 통합됨에 따라 구미시 황상동이 되면서 인의동, 신동, 구평동과 함께 행정동인 인동동 관할이 되었다.
[자연환경]
신방산 기슭 어운산과 건대산이 병풍처럼 둘러 있는 한적한 농촌으로 마을 뒤쪽으로 황상산, 앞쪽으로 황상들이 펼쳐져 있다. 동쪽으로 천생산이 황상동·신동·금전동·장천면 등에 걸쳐 병풍처럼 펼쳐 있고, 서쪽으로 낙동강이 휘감아 돌아 나간다. 돌고개·한태재 등의 고개가 있다.
[현황]
인동동 동북단에 있는 마을로, 2009년 2월 현재 면적은 4.56㎢이며, 총 5,064가구에 13,780명[남 6,841명, 여 6,939명]의 주민이 살고 있다, 남쪽으로 인의동, 서쪽으로 임수동, 남서쪽으로 구미1공단과 구미3공단, 북쪽으로 구미4공단과 접한다. 1980~1990년대 구미2공단과 구미3공단 개발과 주택지 조성 및 구미국가산업단지 근로자 이주에 따른 격동기를 지나 강동의 중심지로 부상하고 있는 지역이다.
공공기관으로 인동동주민센터·황상파출소가 있고, 교육기관으로 황상초등학교(일반 40학급, 특수 2학급)·구미정보고등학교(18학급), 금융기관으로 인동농협·대구은행 인동지점·하나은행 구미공단지점·우리은행 인동지점이 있다. 사회 복지 시설로 구미종합사회복지관이 있다. 문화재로 구미 황상동 마애여래입상(보물 제1122호), 구미 황상동 고분군(사적 제470호), 죽림정사, 농암서원 터 등이 있다.
구미 황상동 마애여래입상과 관련하여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전해 온다. 삼국시대 나당연합군이 백제를 칠 때 당나라에서 파견된 한신(韓信)이라는 장수가 백제군의 포로가 되었다. 그런데 어느 날 밤 꿈에 보살이 포모시자(布毛侍者: 중국 당나라 승려 초현통 선사)로 변신하여 나타나 도망가는 길을 가르쳐 주어 한신은 무사히 도망할 수 있었다.
그 후 한신은 본국에 무사히 돌아갔고 생명의 은인이었던 보살의 얼굴이 생각나 황상동의 암석에 그 모습을 새기니 이것이 황상동 마애여래입상이다. 이 불상을 조각한 뜻은 신라의 영원한 통일을 기원하며 극락세계가 이 땅에 성취되기를 기원하기 위함이라 한다. 오늘날에도 이 불상에 진심을 가지고 기원하면 병이 완치된다고 하여 신자들의 발걸음이 끊이지 않는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