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120144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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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權快福 |
영어음역 | Gwon Kwaebok |
분야 |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
유형 | 인물/의병·독립운동가 |
지역 | 경상북도 구미시 시미동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집필자 | 권영배 |
성격 | 독립운동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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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신지 | 경상북도 구미시 시미동 |
성별 | 남 |
생년 | 1921년 |
본관 | 안동 |
대표경력 | 다혁당 당수 |
[정의]
일제강점기 경상북도 구미 출신의 독립운동가.
[개설]
아버지는 권상근(權相瑾)이며, 경상북도 구미시 시미동에서 3남으로 태어났다.
[활동사항]
권쾌복은 대구사범학교에 다니던 1941년 2월 15일 같은 학교 학생 문홍의(文洪義)·배학보(裴鶴甫) 등과 함께 항일 결사 다혁당(茶革黨)을 조직하여 활동하였다. 다혁당은 대구사범학교에 조직되어 있던 비밀결사 문예부·연구회의 항일 정신을 계승하였을 뿐 아니라, 기존의 백의단(白依團)을 발전적으로 해체하고 새로운 조직으로 확대·개편하여 문학·미술·학술·운동 등 각 분야에 걸쳐 실력을 양성함을 목적으로 하였다.
또한 다혁당은 조직을 교내에 국한하지 않고 대외적으로 조직을 확대하여 다른 학교 학생은 물론 일반인까지도 대상으로 하였으며, 그에 따라 결사의 명칭도 당(黨)이라 하였다. 조직으로는 당수·부당수와 산하에 총무부·학술부·문예부·연구부·경기부 등 각 부서를 두었는데, 권쾌복은 당수 겸 예술부장의 직책을 맡았다. 다혁당은 당원의 비밀 엄수와 절대 복종 및 주 2회 회합과 하급생 지도 등을 당 규약으로 정하였으며, 1941년 3월부터 동년 5월까지 세 차례 모임을 갖고 당의 활동 상황과 조직 확대에 대해 협의하였다.
민족 차별 교육에 반대하여 한국인 학생인 심상과 학생과 일본인 학생인 연습과 학생에 대한 차별 대우를 철폐시키는 방안도 토의하였다. 1941년 7월에 대구사범학교 윤독회의 간행물인 「반딧불」이 일본 경찰에 발각됨에 따라 대구사범학교 비밀결사의 전모가 드러나게 되었다. 이로 말미암아 권쾌복은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2년 여 동안 미결수로 혹독한 고문을 당하였으며, 1943년 11월 대전지방법원에서 징역 3년 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르다가 1945년 8월 15일 광복으로 출감하였다.
[상훈과 추모]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수여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