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120295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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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新羅佛敎-初傳地-桃李寺 |
영어의미역 | Dorisa Temple, the First Introduction Site of Buddhism in Silla Period |
분야 | 종교/불교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
지역 | 경상북도 구미시 해평면 송곡리 |
시대 | 고대/삼국 시대/신라 |
집필자 | 한기문 |
[일선 지역이 불교 초전지가 된 까닭]
불교가 신라에 전래된 경로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견해가 있다. 남해로를 통해 한반도의 동해안 연안 지방에 직수입되었다는 주장이 있고, 433년 나제동맹으로 중국 남조의 불교가 백제를 통해 신라에 전래되었다는 주장이 있다. 그리고 고구려 문화가 육로로 전해질 때 불교가 전래되었다는 주장이 있는데, 이 육로의 경우 두 갈래의 가능성이 있다. 하나는 조령 혹은 계립령을 넘어 일선 지역을 거쳐 경주로 유입되는 경로이며, 다른 하나는 죽령을 넘어 영주·안동 등지를 거쳐 경주로 이어지는 경로이다.
이들 전래 경로 중에서 고구려를 통한 육로 경로의 가능성이 크다. 신라는 내물왕 대에 고구려 광개토왕의 도움으로 왜를 물리쳤으며, 실성왕과 눌지왕 즉위에도 고구려의 영향력이 작용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5세기 초 눌지왕 대에 불교 전래 기록이 전하고 있기 때문이다. 고구려를 통한 육로의 전래 가능성 중에서 죽령을 통한 경로보다는 계립령을 통해 일선 지역을 경유한 경로가 유력하다. 이는 사로국(斯盧國)이 소국들을 정복할 때 상주의 사벌국으로 진출한 예를 통해 알 수 있다.
사로국은 파사이사금(婆娑尼師今) 때부터 주위의 여러 소국을 정복하기 시작하여 낙동강 동안과 소백산맥 동쪽의 소국들을 모두 편입시켰다. 사벌국과 사로국의 관계는 점해이사금(沾解尼師今) 때 석우로(昔于老)가 “예전에 우리에게 복속했었는데, 홀연히 배반하고 백제에 귀속하였다”라는 명분으로 사벌국을 토벌한 기사에서 나타난다. 이때의 정복 사건은 사로국과 지배-복속 관계를 맺어 온 사벌국이 돌연 그 관계를 단절하고 백제 세력과 연결을 도모한 데서 비롯되었으리라 추측된다.
주군제(州郡制) 시행 이전에 지배-복속 관계는 소국의 지배 기반을 그대로 인정한 채 정기적으로 공납물을 바치게 하고 복속 의례를 준수하게 하고, 반란이나 세력권에서 이탈할 때는 군대를 파견하여 응징하는 방식이었다. 293년(유례왕 10) 2월에 사도성(沙道城)을 개축하고 사벌주(沙伐州)의 호민(豪民) 80여 가를 옮겼다는 기록은, 사벌국의 지배 세력을 약화시키기 위한 신라의 사민 정책이 시행된 것으로 볼 수 있고 그만큼 이 지역의 토착 세력이 강고했었음을 시사한다. 또한 사벌국의 토착 세력이 무력화되어 신라 지배에 들어갔음도 시사한다.
사로국의 사벌국으로의 진출은 일선 지역을 경유하였을 가능성이 가장 높다. 그렇다면 신라는 사벌국으로 진출하기 이전부터 이미 일선 지역에 상당한 기반을 확보해 놓았을 것이다. 따라서 불교의 신라 유입 경로는 고구려를 통한 계립령을 거쳐 일선 지역을 경유한 경로가 가장 주된 것이라 할 수 있다. 이 때문에 일선 지역을 중심으로 나타나는 눌지왕 때의 묵호자와 아도, 모례에 대한 여러 기록들의 의미는 크다 할 수 있다.
[아도와 모례가 불교 전래에서 한 역할]
아도와 모례에 관한 기록으로는 김대문(金大問)의 『계림잡전(鷄林雜傳)』, 아도본비(我道本碑), ‘고기(古記)’, 고득상(高得相)의 ‘시사(詩史)’ 등이 있다. 이들 기록 중 아도와 모례와 관련된 부분을 검토하여 아도와 모례의 불교 전래에서의 역할을 살펴보자. 먼저 김대문의 『계림잡전』을 인용한 『삼국사기』의 기록은 다음과 같다.
“앞서 눌지왕 때 사문 묵호자가 고구려로부터 일선군에 오니 군인 모례는 집에 굴실을 만들어 그를 있게 했다. (중략) 이때 왕녀가 병으로 위독해서 왕은 묵호자로 하여금 향을 살라 축원을 드리게 하였더니 왕녀의 병이 곧 나았다. 왕은 매우 기뻐하여 예물을 후하게 주었다. 묵호자는 모례를 보고는 얻은 물건을 주며 ‘나는 이제 갈 곳이 있다’하고 작별을 청하더니, 잠시 후 그가 간 곳을 알 수 없었다. 비처왕 때 이르러 아도화상이라는 이가 시자 3인과 더불어 또 모례의 집에 왔는데, 묵호자와 비슷하였다. 수년 동안 살다가 병 없이 죽었다. 시자 3인은 그대로 머물면서 경율을 강독하였는데, 이따금 신봉자가 있었다.”(『삼국사기』권4, 신라본기4, 법흥왕 15년)
이 기사는 눌지왕 때 묵호자가 고구려로부터 일선군에 와서 모례의 집에 있다가 왕실의 구병(救病) 활동을 하였고, 비처왕(毗處王) 때 아도가 시자 3인과 함께 모례의 집에 묵었는데 수년 후 죽고 그 후 신봉자가 있었다고 전한다. 일연이 『삼국유사』에서 인용한 아도본비의 기사 중 아도와 모례에 관련된 부분은 다음과 같다.
“아도는 곧 계림의 왕성 서리에 와서 우거하니, 때는 미추왕 2년(263)이었다. 아도는 대궐에 들어가 불법을 펴기를 청하니 전에 못 보던 것이라 하여 꺼리고, 죽이려는 사람까지 있어 속림(續林: 일선현) 모록(毛祿)의 집에 도망가서 숨었다[祿은 禮와 자형이 비슷한 데서 생긴 오류]. (중략) 3년이 되던 해에 성국(成國) 공주가 병이 들었는데 아무도 고치지 못하자 아도가 대궐에 들어가 치료하여 나았다. 왕은 기뻐하여 아도의 소원을 묻자 천경림에 절을 지어 불교를 크게 일으키고 나라의 복을 비는 것이라 하였다. 이에 공사를 명하여 띠풀로 검소하게 집을 지었으니 곧 흥륜사(興輪寺)이다. 모록의 누이 사씨(史氏)는 아도에게 귀의하여 비구니가 되고, 또한 절을 지어 영흥사(永興寺)라 하였다. 미추왕이 세상을 떠나자 국인이 아도를 해치려 하므로 모록의 집으로 돌아와 스스로 무덤을 만들어 자절(自絶)하고 이로 인하여 대교가 폐지되었다.”(『삼국유사』권3, 흥법3, 아도기라)
이 기사는 『삼국사기』와는 달리 아도가 미추왕 때 경주에 와 있으면서 불법을 펴는 일이 여의치 않자 일선 모록의 집으로 물러나 있다가 다시 공주의 치병으로 신임을 얻어 흥륜사를 창건하고, 모록의 누이 사씨가 아도에 귀의하여 비구니가 되고 미추왕이 죽고난 후 아도는 수난을 피하여 모록의 집으로 돌아와 자절한 것으로 전한다. ‘고기’의 내용은 각훈의 『해동고승전』 아도전에 전하는데, 아도와 모례 부분만 제시하면 다음과 같다.
“고기를 보면 다음과 같다. 양(梁) 대통(大通) 원년 3월 11일에 아도가 일선군에 오니 천지가 진동하였다. 스님은 왼쪽에 금환석장(金環錫杖)을 쥐고, 오른손에는 옥발응기(玉鉢應器)를 들고, 몸에는 누더기 장삼을 입고, 화전(花詮)을 외면서 처음 신사(信士) 모례(毛禮)에 이르니, 모례가 나가 보고 깜짝 놀라며 말하였다. ‘지난 날 고려 승 정방(正方)이 우리나라에 들어왔을 때, 군신이 괴이히 여겨 상서롭지 못하다 하고는 의논하여 죽였습니다. 또 멸구자(滅垢疵)라는 이가 정방의 뒤를 따라 다시 왔었는데 역시 죽였습니다. 당신은 무엇을 구하러 또 여기 왔습니까? 빨리 문안으로 들어와 이웃 사람들의 눈에 띄지 않도록 하십시오.’ 그리고는 그를 밀실로 끌어들여 공양을 게을리하지 않았다. 때마침 오(吳) 나라 사신이 오향(五香)을 가지고 와서 원종왕에게 바쳤다. 왕은 그것의 용도를 몰라 두루 나라 안에 물어보도록 하였다. 사자가 법사에게 와서 물어보니 스님은 말하였다. ‘그것은 불로 태워 부처님께 공양하는 것입니다.’ 그 뒤 서울에 함께 돌아오니, (중략) 왕은 이로 인하여 불승은 공경해야 하는 것임을 알고 반행을 칙허하였다.”(『해동고승전』권1, 아도)
“고기에 말하였다. 법사가 처음 모록(毛祿)의 집에 왔을 때 천지가 진동하였다. 그 때 사람들은 승이란 명칭을 알지 못했으므로 아두삼마(阿頭彡麽)라 했다.”(『삼국유사』권3, 흥법3, 아도기라)
이들 기사는 아도가 법흥왕 대에 온 것으로 전한다. 여기서도 역시 모례가 중요한 후원자로 나타나 있다. 아도 이전에 고구려 승려 정방과 멸구자가 왔던 사실이 제시되고 있는 것이 다른 기록과 다르다. 마지막으로 『해동고승전』에 인용된 고려시대 고득상의 영사시에 나타난 기록은 다음과 같다.
“고득상 시사는 다음과 같다. 양(梁) 나라에서는 원표(元表)라는 사신을 시켜 침단향(沈檀香)과 불경, 불상을 보냈다. 신라에서는 그 소용을 몰라 사방에 물어보았다. 아도가 이때를 만나 그 사용법을 가르쳐 주었다. 고득상이 주하였다. 아도는 두 번이나 참해를 당하였으나 신통력으로 죽지 않고 모례의 집에 숨어 있었다.”(『해동고승전』권1, 아도)
이 기사는 ‘고기’와 비슷하게 법흥왕 대에 아도가 왕실과 접촉하였다고 전한다. 이상의 네 가지 불교 전래 기사에서 아도와 모례에 관한 기록은 거의 공통적으로 추출되고 있다. 이에 대한 자세한 고증과 자료 비판이 있지만, 대략 정리되는 것은 아도가 신라에 불교를 전한 전도승의 대명사와도 같이 쓰였다는 것이고, 일선 지역의 모례 역시 고구려에서 계속 오는 전도승을 숨겨주고 거처까지 마련해준 후견인으로서 대표적인 존재였다는 것이다.
모례는 일선 지역에서 상당한 지위와 경제적 부를 누린 인물이었다. 아도화상 사적비에 모례는 장자(長者)라고 불렸으며 소와 양 수천 마리를 기르고 있었다고 한 기록이 이러한 사실을 뒷받침한다. 장자는 어른이나 부자를 뜻하는 말이다. 그리고 일선 지역이 고구려에서 신라 경주로 가는 길목임을 감안하면 모례는 일찍부터 고구려 문물을 접한 인물이라 추정된다. 더 나아가 모례는 신라 왕실과도 밀접한 관련이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신라의 지방 지배는 초기에는 간접 지배 방식이었으므로 지방 세력과 왕실과의 문물 교류가 활발하였을 것으로 추측된다. 아도가 모례가에 있다가 왕실에 진출했다든가 왕실에서 배척되었을 때 숨은 곳이 모례가였다는 사실은 모례와 왕실과의 어떤 관계를 추측할 수 있게 한다.
지금까지는 모례의 후견 하에 민간 차원의 불교 전파를 상정하고 있지만, 한편 모례가를 통한 왕실과의 접촉도 상정해 볼 수 있다. 신라 초기 불교 수용의 주체는 왕실이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소지마립간 대에 왕궁의 내전에 둔 분수승과 5세기 대 적석목곽분의 유물에 보이는 불교적 요소들은 불교 수용의 주체가 왕실이었음을 짐작케 한다. 물론 소지왕 대의 기록만으로는 불교 수용기 왕들의 불교에 대한 태도를 일률적으로 말할 수는 없지만, 왕실이 불교 수용의 주체였다고 보는 데는 무리가 없다. 왕실과 문물 교류를 하고 있는 일선의 모례가는 왕실의 불교 수용 움직임에 따라 신축적으로 대응한 전도승의 후견 세력이었을 것이다. 고구려를 통해 들어오는 전도승을 후견하는 것으로 미루어 모례가는 친고구려계이면서 신라에 협조한 세력으로 추정되기도 한다.
[도리사에서 출토된 유물과 유적]
아도가 도리사를 창건했다는 사실은 “모례의 집에서 생활한 지 3년이 된 아도는 홀연히 집을 떠나 부근의 냉산으로 들어갔다. 산속을 걷다가 눈속에 복숭아꽃과 오얏꽃이 활짝 핀 곳을 발견하고는 그곳이 길지임을 깨닫고 절을 세웠는데 그 절이 도리사이다.”라 전해지는 설화를 통해 알 수 있다. 그런데 현재의 도리사는 아도가 창건했다는 바로 그 도리사는 아니다. 본래의 도리사는 폐사되었고, 후대에 도리사의 부속 암자였던 금당암을 중심으로 하여 중창한 절이 현재의 도리사이다.
그러면 도리사의 구기(舊基)는 어디인가? 현재 냉산의 남록 즉 현 도리사로 올라가기 전 계류변에 장대한 석축지가 있는데, 이곳을 마을에서는 옛 도리사지라 한다. 이러한 비정은 “금당암은 도리사 북쪽에 있다(金堂庵在桃李寺北)”라는 『신증동국여지승람』 불우조 기록과 일치한다. 그리고 이 사지는 대웅전, 누각 등의 건물을 조영할 수 있을 만큼 넓은 대지에 위치하고 있고, 와편도 흩어져 있다. 도리사 일대에서는 주목할 만한 유물이 전해지고 있다. 도리사 석탑, 도리사 금동육각사리함 진신사리, 아도화상 사적비, 도리사불량답시주질비, 도리사 극락전, 도리사 목조아미타여래좌상, 아도화상 좌선대 등이 있다. 도리사 금동육각사리함 진신사리에 대해서 전해지는 이야기가 있다.
「도리사 사적기」에 의하면, 마을 주민 김계장(金界丈)이란 사람이 냉산 기슭에 있는 석적사지(石積寺址)의 불사리탑에서 불사리 1과를 얻었는데, 그 크기가 이의(苡薏)만 하고 색깔이 백옥 같았고, 당시 도리사의 체안대사(體眼大師)가 석옹탑(石甕塔)을 건조하여 불사리를 봉안하였다. 이 석옹탑이 현재 상부의 연봉형 보주(寶珠)에 ‘세존사리탑’이라는 음각명이 있는 석종형 부도로, 17세기 전반기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그런데 이 탑의 사리공에서 출현한 금동육각사리함은 석적사지에서 수습된 것이므로, 도리사 세존사리탑의 조성 연대와는 다르다. 금동육각사리함은 우리나라 초유의 육각사리함이라는 점, 그리고 각부의 문양으로 미루어 8세기 중엽에서 뒤지지 않는 시기의 것으로 보인다.
보물 제470호로 지정되어 있는 도리사 석탑은 극락전 앞마당에 건립되어 있는데, 앞마당 중심선에 건립되었다는 점과 석탑의 현 위치밖에 넓은 대지가 없다는 점 등으로 미루어 원래 위치로 짐작된다. 도리사 석탑은 일반 석탑과는 그 형태를 달리하는 특이한 모습이다. 지붕돌이 없고 네모진 돌탑 모양을 하고 있어서 석탑 양식이 정착되기 전의 시원적 탑일 가능성도 있다. 벽돌로 쌓은 전탑이나 모전석탑의 계열에 가깝다. 도리사 석탑은 현지에서 화엄석탑이라 호칭하는데 확실한 근거는 알 수 없고 구전에 의하고 있다. 조성 연대는 남면 상하에 모각된 양문비(兩門扉) 양식과 각 부재의 치석 수법으로 보아 고려시대로 추정된다.
도리사 석탑 남쪽의 비탈진 송림에 아도화상 사적비가 있다. 자연 암석을 대석으로 삼고 그 위에 직사각형의 구멍을 파서 세웠다. 화강암을 마연하여 탑신을 만들었다. 자운비(慈雲碑)는 아도화상 사적비의 배면에 음각되었다. 자운비는 아도비 외에 불상과 불좌를 조성하는 불사를 진행한 주관자와 그 비용, 그리고 불사에 관련된 성속의 명단을 적은 음기인 셈이다. 주관자는 승려 지문(智文)으로 되어 있다.
도리사불량답시주질비는 자연 암석을 대석으로 삼고 상면에 사각의 구멍을 파서 비신을 꽂아 세웠다. 비문은 화강암을 마연하여 전후면에 음각하였다. 도리사에 불량답을 시주한 내용을 밝혀 놓았고, 1712년(숙종 38) 석수 김성원(金成元)이 각자하고 승통 능철(能哲)이 세웠음이 나타나 있다. 아도화상 좌선대는 아도화상 사적비 앞에 산 아래의 풍광을 내려다 볼 수 있는 자리에 있다. 도리사의 본당인 극락전은 전내의 중수 및 단청에 관련된 현판에 의하면 1807년, 1876년, 1930년에 각각 중창되었음을 알 수 있다. 정면 3칸, 측면 3칸이며 팔작지붕이다.
도리사 극락전 내에 있는 목조아미타여래좌상은 표면에는 건칠(乾漆)을 하고 금박을 입혔으며 상호 각부에는 색칠을 하였다. 1968년 3월 개금하기 위해 불상을 다른 곳에 안치하고 밑의 보료를 들어냈을 때 그 중간에서 수 매의 묵기가 발견되었다. 이들 기록에 의하면, 도리사 목조아미타여래좌상에 대한 최초의 개금은 1731년에 이루어졌는데 이때는 복장까지 보았다고 하며, 두 번째 개금은 1764년에 이루어지고 세 번째 개금은 1876년에 이루어진 것으로 되어 있어 1968년에 네 번째 개금불사(改金佛事)를 한 셈이다. 1731년에 최초의 개금이 이루어진 것으로 보아 도리사 목조아미타여래좌상의 조성 연대는 그 하한이 1700년 이전인 1600년대로 추정된다.
아도화상 석상은 1976년 현 도리사 경내 석탑 및 담장 석축을 정비하다가 발견하였다. 아도화상 석상은 자연석에 치석을 하여 만든 것으로 보이며 전면 폭이 좁아 기이한 감을 주나 조각의 윤곽은 뚜렷하다. 『일선지』 불우조에 아도화상 석상이 있었다는 기록이 있기 때문에 이 석상이 아도화상 석상일 것으로 추정된다. 현재 도리사 조사전에 보관되어 있다. 인근 봉한리 사지에서 1970년대에 금동여래입상과 금동보살입상이 발견되었는데, 이들은 삼국통일 이전 신라의 작품으로 이 지역이 이른 시기의 불교 전래지였음을 말해 주는 유물이다.
[아도에 대한 추모]
아도는 신라 불교의 전래자로서 후대에 추모의 대상이 되었다. 신문왕 이후 성덕왕 대에 생존한 김대문의 『계림잡전』에 불교 수용이 서술되고 있는데, 김용행의 아도화상비문과 비교하여 현실성과 객관성이 높다. 합리주의자 김부식이 아도화상비문이 아닌 『계림잡전』에 의거하여 아도를 서술한 이유를 짐작할 만하다. 『계림잡전』이 개인 저술인 점으로 미루어 김대문 개인에 의해 신라 불교 전래자에 대한 추모가 있었다고 할 수 있다.
한나마(韓奈麻) 김용행(金用行)이 찬술한 아도화상비문은 찬술자가 관리라는 점으로 보아 비의 건립이 국가에 의해 이루어졌다고 할 수 있다. 왕실과 관련된 내용이 『계림잡전』보다 더 강조되어 있다. 김용행의 아도화상비문에는 이차돈의 가계에 대한 내용이 있는데, 이차돈 순교비가 818년(헌덕왕 10)에 세워진 점을 고려하면 아도화상비는 이차돈 순교비에 앞서 세워졌을 것이다. 따라서 아도화상에 대한 국가적 추모는 신라 중대에 있었던 것으로 짐작된다.
흥륜사(興輪寺) 금당에 십성(十聖)을 진흙의 소조상(塑造像)으로 만들어 봉안할 때 아도의 소조상도 있었다. 즉 “동쪽 벽에 앉아서 서쪽을 향한 진흙 소조상은 아도(我道)·염촉(猒髑)·혜숙(惠宿)·안함(安含)·의상(義湘)이요, 서쪽 벽에 앉아서 동쪽으로 향한 진흙 소조상은 표훈(表訓)·사파(蛇巴)·원효(元曉)·혜공(惠空)·자장(慈藏)이다.”라 하여 아도가 염촉과 함께 신라 최초의 공식적인 사원인 흥륜사의 금당에 모셔진 것이다. 이러한 국가적 추모 사업은 경덕왕 대에 활동한 표훈보다 앞설 수는 없다는 점으로 보아 혜공왕 이후 신라 하대의 일로 추정된다.
그 시기를 구체적으로 추론하면, 이차돈 추모사업이 이루어지고 선종이 보급되던 헌덕왕·흥덕왕 대일 것이다. 아도를 포함한 십성은 불교의 정착, 불교의 대중화, 국가 불교의 성립에 기여한 성자들로 선정되었다. 이로 보면 신라 불교의 전래자로서 아도에 대한 국가적 추모 사업은 신라 중대 이후 계속 있었다고 할 수 있다. 특히 선종이 공인되자 유가계(瑜伽系) 흥륜사가 범 교종계를 포용하여 선종에 대응하려는 의도로 불교의 공덕을 강조하는 가운데 아도를 십성에 포함하여 금당에 모신 것으로 생각된다.
모례가 유적지 주변 일대에는 주륵사지(朱勒寺址), 죽림사지(竹林寺址), 보천사지(寶泉寺址) 등의 대가람지가 있고, 낙산동 삼층석탑, 원동 삼층석탑, 교동 삼층석탑, 죽장사 오층석탑 등의 석탑이 건립되어 있다. 이처럼 한 지역에 불교 유적이 조밀하게 분포되는 경우는 희귀하다. 이들 유적의 연대는 대략 8세기에서 9세기에 걸친다. 이 시기는 아도를 성인으로 추모하기 시작한 신라 중대에서 하대에 이르는 시기와 일치한다. 이로 보아 모례가를 중심으로 한 일선 지역이 불교 성지로 인식되면서 사원과 석탑이 세워졌다고 할 수 있다.
고려시대에도 아도에 대한 추모는 계속되었다. 문종 대 박인량(朴寅亮)의 『수이전(殊異傳)』에는 아도화상비문과 대체로 같은 내용이 소개되었으며, 고종 대 각훈(覺訓)의 『해동고승전』 아도조에서는 ‘고기’와 고득상(高得相)의 영사시(詠史詩)를 인용하여 아도가 불교 전래자였음을 강조하였다. 일연(一然)은 『삼국유사』 아도기라조에서 아도가 신라 불교의 초전자였음을 강조하고 신라에 불법을 일으킨 삼성으로 아도·이차돈·법흥왕을 꼽았다. 이로 보아 각훈·일연 등은 몽고 침입으로 불교문화가 인멸되는 것을 목도하고 이를 복구하기 위해 각종 불교 기록을 정리하면서 아도의 불교 전래 공덕을 강조하고 나아가 고려의 불교문화가 신라의 것을 계승한 것으로 인식한 것이 아닌가 한다.
아도에 관한 비석으로 세 가지가 있었다. 하나는 『삼국유사』아도기라조에 나오는 아도본비이고, 다른 하나는 『삼국사기』 법흥왕 15년조에 나오는 아도화상비이고, 나머지 하나는 『삼국유사』 원종염촉멸신조(原宗猒髑滅身條)의 분주(分注)에 나오는 아도비이다. 뒤의 두 비의 비문은 김용행 소찬이지만, 『삼국유사』 아도기라조의 아도본비의 비문은 김용행 소찬 비문과는 내용이 다르다. 그리고 작성 시기도 사성비(四聖碑)가 제작되던 고려 중기와 연관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 추론이 성립한다면, 고려시대에 와서 아도 추모비가 세워진 것이라 할 수 있다.
천책(天頙)도 1244년(고종 31)에 작성한 「흥륜사대종명병서(興輪寺大鐘銘幷序)」에서 아도화상이 미추왕 2년에 몸소 유력하고 몰래 교화하였으나 민심이 거칠어 교화할 수 없었고, 그 후 법흥왕 대 천경림을 베어내자 전불시대 가람이 드러났는데 아도의 모친이 예언한 것과 같다고 하였다. 이는 『삼국유사』에서 인용한 아도본비 내용과 비슷하다. 천책도 아도본비를 보았을 가능성이 크다. 현재 도리사 경내에 있는 석탑의 제작 시기가 고려 중엽일 것으로 추정하면, 원래의 도리사를 현재의 위치로 옮긴 것은 고려시대라 할 수 있다. 탑의 입지를 보면 이건한 흔적은 없다. 따라서 고려시대에 현재의 도리사 위치에 사원을 창건하면서 도리사 석탑을 세운 것으로 추정된다.
조선시대에도 아도에 대한 추모는 있었다. 현재의 도리사 세존사리탑의 제작 시기나 아도화상 사적비의 건립 연대가 17세기 전반인 점으로 미루어 조선시대에 한 차례 신라 불교 전래지가 강조되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아도화상 사적비에 이 일대에 구전된 아도와 모례에 관한 전설이 잘 정리되어 있는 것은, 도리사가 신라 불교 초전지임을 확인하고 강조하려는 움직임이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이는 전란 후 지역 사회를 안정시키려는 향토 문화 의식의 소산이 아닌가 한다. 즉 불교 전래자인 아도를 추모함으로써 불교 전래 공덕을 강조하여 전란의 후유증을 극복하려는 의도가 있었다고 추측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