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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5700027
한자 逆戰-名手群山商高-群山野球-발자취
분야 문화·교육/체육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지역 전라북도 군산시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조종안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경기 시기/일시 1921년 7월 5일 - 군산 최초의 야구 경기
창단 시기/일시 1968년 - 군산상업고등학교와 군산남중학교 야구부 창단
관련 사항 시기/일시 1972년 7월 19일 - 제 26회 황금 사자기 결승에서 군산 상업 고등학교 9회 말 역전, ‘역전의 명수’라고 불리게 됨
현 소재지 군산상업고등학교 - 전라북도 군산시 석치1길 17번지[문화동 785-3]지도보기

[일제 강점기 군산의 야구]

군산에 야구(野球)가 처음 소개된 시기는 1910년(융희 4) 경술국치(庚戌国恥) 이전으로 추정된다. 미국 선교사들이 1894년(고종 31) 봄 호남 최초로 선교를 시작한 지역이라는 점과 전위렴[W. M. Junkin] 선교사가 지금의 구암 동산에 1899년(광무 3)에 세운 구암 교회, 1903년(광무 7)에 세운 영명 학교의 설립 연도 등이 추정을 가능케 한다. 1905년(광무 9)에 청년회, 부인회 등으로 조직된 일본의 기독교회와 1899년(광무 3) 일본인 자녀들이 다녔던 군산 심상 고등 소학교 개교도 힘을 더한다.

전라북도 원로 야구인 송창문의 구술(『전북 체육 1백년사』 상권)에 따르면 야구는 축구와 같은 시기 전북 지방에 들어왔고 경술국치 이후 일본인들이 군산 지방을 중심으로 몰려오면서 야구의 물결이 일기 시작하여 전주에까지 보급되었다. 1910년 처음으로 야구 경기가 열렸으며 당시엔 일본인들이 군산에 들어오면서 생겨났다 하여 ‘왜놈 운동’이라 불렀다 한다.

기록에 나타나는 군산의 최초 야구 경기는 1921년 7월 5일 군산 소학교 운동장에서 치러진 구암리[구암동] 기독교 청년회와 일본인으로 구성된 군산 은행의 우승 쟁탈전이다. 당시 『동아 일보』는 예보 기사에서 ‘기독교 청년회 야구단은 군산 체육계에서 명성이 자자하며, 각지에 유학 중이던 회원들이 하기 휴가를 맞아 고향을 방문, 팀에 합류하여 의미를 더했다’고 덧붙이고 있다.

같은 해 10월 15일부터 17일에는 군산 영명 학교와 광주 숭일 학교 야구 대항전이 열렸다. 개최 장소와 경기 결과는 확인되지 않는다. 다만 당시 운동장 사정과 같은 미션 계열 학교 친선 경기인 점으로 미루어 군산 영명 학교 운동장으로 추정된다. 광주 숭일 학교 역시 미국 남장로교 선교사들이 1908년 2월에 설립했으며 1915년 광주 지역에서 최초로 야구를 도입한 학교였다.

군산에서 야구를 처음 시작한 사람은 양기준(梁基俊)[1896~1975]과 김판술(金判述)[1909~2009] 전 의원으로 알려졌다. 양기준은 영명 학교에 다니면서 야구를 배웠고, 김판술은 군산 심상 고등 소학교[군산 초등학교의 전신] 4학년때 야구와 인연을 맺었다. 특히 양기준은 영명 학교 졸업 후 구암 병원[야소 병원] 직원으로 근무하면서 기미년[1919년] 3·5 만세 운동에도 앞장서 참여하였고,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대구 감옥에서 6개월간 옥고를 치른 것으로 전해진다.

1923년 5월 일본인에 의해 개교한 군산 중학교는 일찍이 야구부가 창단된다. 군산 중학교는 1928년 7월 28일 서울 경성 구장과 용산 구장에서 개최된 대조(大朝) 주최 제 15회 전일본 중등학교 야구 우승권 대회 조선 대회에 출전한다. 그러나 서울 휘문 중학교와의 1차전에서 5회 기권패[콜드게임]를 당한다. 휘문 중학교는 1907년(융희 1)에 야구부를 창단한 야구의 명문이었다.

당시 휘문 중학교 팀은 순수 한국인 학생으로 구성돼있는 반면 군산 중학교는 남촌(南村), 등전(藤田), 중서(中西), 길미(吉尾), 유상(有常), 십본(辻本), 김판술(金判述), 등전무(藤田茂), 분자원(盆子原) 등으로, 김판술을 제외한 선수 모두가 일본 이름이어서 눈길을 끈다. 군산 중학교는 17회 대회와 19회 대회에도 참가한다.

군산 중학교를 졸업한 김판술은 일본에 유학하여 우쯔노미야[宇都宮] 고등 농림농과에 다닐 때까지 4번 타자로 활약하다 교토[京都] 대학교 농림 화학과로 진학해서 선수 생활을 그만둔다. 그러나 1957년 국회의원 시절 중앙청 광장에서 열린 행정부~입법부 친목 야구 시합 때 선수로 뛸 정도로 야구에 애착이 높았다고 한다.

군산 체육 협회가 주최하고 오사카[大阪] 아사히[朝日] 신문 군산 지국이 후원하는 호남 야구 대회가 1928년 6월 16일~17일 이틀간 군산 중학교 운동장에서 개최된다. 대전, 이리[益山], 전주, 광주, 군산 등 5개 팀이 참가하였다. 예선전을 펼친 후 대전과 군산 팀이 결승에 올라 군산팀이 6대 3으로 승리하여 택촌(沢村) 군산 부윤(群山府尹)으로부터 우승기를 받는다.

군산의 조선인 체육은 1932년 군산부 일출정[금암동]에 부영 공설 운동장이 만들어지고, 각 단체가 창단 또는 재조직되면서 자리를 잡기 시작한다. 1930년 이전에도 몇 개 체육단체가 활발히 활동했으나 한 때 바람으로 끝났고, 그동안 없던 농구 클럽 출범과 축구 클럽의 개혁, 야구 구락부[척우단 후신] 재조직 등으로 전기를 마련한다.

군산의 성인 야구는 1929년 봄 척우단(拓友団)이 결성되어 전의용의 인솔로 전 조선 야구 대회에도 출전한다. 그 후 선수들의 이사, 사망 등으로 침체기를 거쳐 1933년 7월 양태보, 이완동 등 뜻있는 야구인들이 중앙 진출을 목표로 재조직, 전주팀과 친선 경기를 개최한다. 당시 야구 구락부 연락처는 군산부 동영정[신영동] 동화 의원에 두었고, 간부는 이창근, 전의용, 김수복 등이었으며. 회원 20여 명의 회비로 단체를 끌어갔다.

1935년 7월 군산 공설 운동장에서 동경 유학생 야구팀과 군산 야구팀 경기가 열렸다. 『동아 일보』·『조선 일보』·『중앙 일보』 지국과 조선 매일 신문 호남 지사가 공동 주최하고 입장료 20전을 받았음에도 수천의 관중이 모여들었다. 이날 경기는 오후 5시부터 7시까지 접전을 벌인 끝에 군산팀이 8대 7로 승리하였다. 유학생 팀은 비록 패했으나 열정과 투혼으로 많은 격려를 받았다고 한다.

[1945년 해방 이후 군산 야구의 활약]

1937년 중일 전쟁, 1941년 태평양 전쟁을 일으킨 일제는 ‘내선 일체’를 내세우며 기독교 학교 폐쇄와 체육 대회 중단 등 민족 말살 정책을 자행한다. 따라서 1938년~1945년 8월까지 전국 규모 대회에 출전한 기록이 없으며 1945년 10월 27일부터 5일간 서울에서 개최된 ‘자유해방 경축 전국 종합 경기 대회’[제 26회 전국 체육 대회]에 군산 야구팀이 전북 대표로 출전한다.

일반부 경기에서 군산팀은 한영팀에게 18대 8로 대승했으나 준결승에서 대전팀에게 4대 10으로 져서 3위를 차지했다. 당시 군산팀은 감독 김수복, 선수 이완동[주장], 최문보, 양태수, 이용준, 김수복, 김수연, 백판덕, 김수한, 한명수, 전익배, 서병철, 김태종, 임영권, 황용곤 등이었다. 1946년 10월 개최된 제 27회 전국 체육 대회에는 군산 상업 학교, 제 29회에는 군산 중학교, 제 30회·제 32회 대회에는 군산팀이 참가하였다[제 31회 전국 체전은 전쟁으로 중지].

1947년 7월 『동아 일보』가 주최한 제 1회 전국 지구 대표 야구 쟁패전에 군산팀은 전북 대표로 출전하여 1회전에서 탈락한다. 당시 진용은 단장 장준식, 감독 김□연, 투수 최문보·양태수, 포수 이완동·한완섭·김태준, 1루수 황동[주장]·홍철표, 2루수 양태수, 3루수 김진봉, 유격수 김수운·김수한, 좌익수 한명수, 중견수 김수한·전익배, 우익수 김암천 등이었다.

1948년 전국 4개 도시[서울 경기 중학교, 인천 동산 중학교, 부산 경남 중학교, 군산 중학교] 우수 중학 대항전에 초청을 받고 출전한 군산 중학교가 우승하였다. 군산 체육회와 『군산 민보(群山民報)』가 공동 주최한 호남 도시 대항 및 중등 야구 쟁패전에서도 중등팀은 군산 중학교가, 지역 대표팀은 대전팀이 우승한다. 이 대회는 금암동에 있는 공설 운동장에서 오일 동안 치러졌다.

1949년 6월 군산 체육회는 군산 야구계의 공로자 ‘양태보(梁泰宝) 추도 야구 대회’를 군산 중학교 야구장에서 개최한다. 군산부청, 조운 군산 지점, 미창 군산 지점, 군산 중학교 4개 직장팀과 군산·이리 팀이 참가한 대회에서 조운 군산 지점과 군산 중학교가 공동 우승, 도시는 군산팀이 각각 우승한다. 군산 중학교는 1949년 군산 체육회가 개최한 8·15 경축 야구대회[시내 학교와 직장팀 참여]에서도 우승의 영예를 안았다.

[군산 야구와 황금 사자기 대회와의 인연]

군산은 해방 이듬해인 1946년 당시 남선 전기[현 한국 전력] 군산 지점 야구팀 후원과 정윤기, 황동 씨의 적극적인 활동으로 창설한 군산 중학교 야구팀이 전북 지역 예선에서 전주공업을 14대 1, 군산상업을 11대 1로 제압하고 본선에 진출하면서 황금 사자기와의 인연이 시작된다.

좌우 대립으로 혼돈이 극에 달했던 1947년 여름 황금빛 사자가 첫 포효를 터뜨린다. 『동아 일보』가 주최하는 제 1회 황금 사자기 대회가 개막, 당시 공식 명칭은 ‘제 1차 전국 지구대표 중등 야구 쟁패전’으로 전국을 서울, 경기도, 강원도, 충청남도[충청북도 포함], 전라남도[제주도 포함], 전라북도, 경상북도, 경상남도 등 8개 지역으로 나눠 지역 예선이나 추천을 받아 참가하는 방식이었다.

개막전은 8월 20일 강원 중학교~경남 중학교가 가질 예정이었으나 강원 중학교의 뜻밖의 화재로 불참하였다. 경남 중학교의 기권승이 확정된 데다 갑작스러운 폭우로 하루 연기된다. 8월 21일 오후 1시 『동아 일보』 최두선 사장의 개회사와 김동성 조선 야구 협회 회장의 축사에 이어 군산 중학교 구한섭 주장의 선수 대표 선서로 개회식을 마치고 오후 2시 35분 군산 중학교~동산 중학교의 대결로 플레이볼 되었다.

황금 사자기 개막전 첫 투구는 인천 동산 중학교 박현식에 의해 뿌려졌고, 첫 타자는 군산 중학교 최문길 선수였다. 당시 군산 중학교 진용은 감독 정윤기, 코치 황동·최문포, 투수 최명보, 포수 서병철, 1루수 조상기, 2루수 이순철, 3루수 최문길, 유격수 최동현, 우익수 이문갑, 좌익수 구한섭[주장], 중견수 김우효, 후보 선수 5명[김진복, 육기술, 노재욱, 김양수, 최성현]으로 짜여 있었다.

군산 중학교의 선공으로 시작한 이날 경기는 2시간 10분에 걸쳐 치러졌다. 동산 중학교가 1회에 두 점을 선취하자 군산 중학교가 2회와 4회에 각 한 점씩 뽑아 동점을 만드는 등 엎치락뒤치락하면서 동점 번복만 3차례 이루어졌고, 9회까지 승부를 가리지 못하다가 연장 10회 말 군산 중학교가 1점을 내주면서 5대 4로 석패한다.

군산 중학교는 1947년 5월 서울 원정 경기에서도 휘문 중학교, 경동 중학교, 인천 공업학교, 인천 상업학교 팀과 대결, 연전연승으로 주위 사람들을 놀라게 하였다. 6월에는 공주 중학교, 이리 농업학교 팀과도 격전 끝에 대승을 거둬 야구 평론가들에게 강팀으로 인정을 받았으나 아깝게 1차전에서 탈락했다.

1948년 제 2회 황금 사자기 대회는 호남 지방을 휩쓴 30년만의 대홍수로 전라북도·전라남도 및 충청북도·충청남도 지역 4개 팀이 불참한다. 그러나 군산 중학교 야구팀은 1948년 우수 중학 야구팀으로 초청받아 서울 경기 중학교, 인천 동산 중학교, 부산 경남 중학교 등이 참가하는 전국 4개 도시 우수 중학 야구전에 출전하여 우승한다.

군산 중학교는 1949년 제 3회 황금사자기 대회에 전북 대표로 출전했으나 1회전에서 탈락한다. 당시 진용은 감독·부장 정윤기, 코치 김태준, 주무 이완동, 선수 정흥태[투수], 김창인[포수], 조춘환[1루수], 이태환[2루수], 김상훈[3루수], 최문길[유격수], 김재환[좌익수], 박인안[중견수], 김재권[우익수], 후보 선수 장명석, 임양수 등이었다.

황금 사자기 쟁패전은 1950년 6·25 전쟁으로 4년 동안 열리지 못하다가 1954년에 부활한다. 전쟁과 학제 개편[중학교·고등학교 분리]의 혼란 속에 대부분 야구부가 해체되었기 때문이었다. 군산 중학교도 군산 중학교, 군산 고등학교로 분리되면서 야구부가 중학교에 존속되고, 전라북도·전라남도 고교팀이 두각을 나타내지 못하면서 호남은 한동안 고교 야구 불모지로 전락한다.

[경성 고무 이용일 사장, 군산에 초중고 야구팀 여섯 개 창단 ]

‘역전의 명수 군산상고’를 탄생시킨 이용일 전 한국 야구 위원회[KBO] 총재 권한 대행. 그는 1931년 전북 군산에서 태어나 군산 중학교 1학년을 마치고 가족을 따라 서울로 올라간다. 서울 경동 중학교[5년제] 2학년 때 야구를 시작, 서울 상대 야구부, 육군 야구단 등에서 내야수로 활약한다.

1956년 소령으로 예편한 이용일은 고향으로 내려온다. 이듬해 3월에는 스물일곱 젊은 나이에 경성고무 상무이사로 취임, 경영 일선에 뛰어든다. 그러나 공장과 사무실만 오가다 보니 체중이 100㎏이 넘어가고 몸이 둔해져서 동호인들을 모아 야구를 시작한다. 순전히 살을 빼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텅 빈 운동장을 보면서 마음이 달라진다.

가난과 낙후된 경제로 상급 학교 진학률이 바닥을 헤매는 군산을 야구로 살리겠다고 다짐한 이용일은 꿈나무를 육성, 중학교·고등학교로 이어지는 피라미드 형식의 야구단을 구상한다. 자신의 뜻을 몇몇 야구인에게 전하고, 초등학교 교장들을 만나 설득하면서 지도자를 물색한다. 노력은 헛되지 않았다. 1962년 2월 군산 초등학교, 남 초등학교, 중앙 초등학교, 금광 초등학교가 야구부를 창단했다.

이용일은 야구 용품은 물론 코치들 월급까지 부담한다. 매년 2회씩 리그전도 개최한다. 대회가 정기적으로 열리자 학생들이 흥미를 두기 시작한다. 입시 경쟁이 치열할 때여서 학부모들 관심도 높았다. 이용일은 경쟁이 가장 심했던 군산 중학교 교장을 찾아가 성실한 선수들을 특기생으로 받아달라고 설득, 1964년부터 추천받은 졸업생들이 진학하게 된다.

군산 중학교에 입학한 선수들이 졸업하는 1967년 초, 이용일은 군산 고등학교 최도철 교장을 만나 야구부 창단 약속을 받아낸다. 당시 그의 직책은 경성고무 사장이었다. 1967년 전라북도 야구 협회장을 맡으면서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그러나 최도철 교장은 적극 나서지 않았고, 지원금도 사용처가 불투명했다.

군산 고등학교를 고집하다가는 모든 계획이 수포로 돌아가겠다고 생각한 이용일은 1968년 군산상업고등학교군산남중학교에 야구부를 창단한다. 그는 김병문 교장과 상의 끝에 건물 한 동을 지어 한쪽은 매점 겸 식당으로, 한쪽은 합숙소로 사용한다. 쌀은 회사 직영 정미소에서 보내주고, 부식비는 매점에서 나오는 이익으로 충당했다.

김병문 교장은 매사에 의욕적이었고, 정이 많아 선수들을 자식처럼 돌봐줬다고 한다. 아침을 거르고 운동장 한편에서 비실대는 양기탁[1972년 황금 사자기 결승 9회 말 동점 타자] 선수를 발견하고 뒷바라지해준 사연은 감동을 자아낸다. 또한, 야구장으로 사용하기에 비좁은 운동장을 ‘동창 한 명이 운동장 한 평 보태기 운동’을 펼쳐 1만 2231㎡를 넓힌 주인공이기도 하다.

이용일 사장이 2000만 원을 쾌척했다는 소식과 함께 군산남중학교·군산 상업 고등학교 야구부에 대한 평판이 좋아지자 서울로 진학했던 군산 중학교 졸업생 가운데 두 명이 다시 내려온다. 정읍에서 노석현, 전주에서 나창기·김준환 등이 군산상업고등학교에 입학한다. 프로야구 원년 홈런왕 김봉연도 전주 북 중학교에서 군산남중학교로 전학하는 등 우수한 유망주들이 모여들었다.

군산상업고등학교 초대 감독 최동현이 1969년 여름 사퇴하자, 전주 출신 서창활을 제 2대 감독으로 추천되었다. 그러나 이용일은 선수들이 지방 출신 감독을 신뢰하지 못하는 기미를 보이자 새 지도자를 물색하던 중 1970년 봄 기업 은행 최관수 선수가 은퇴한다는 정보를 접하고 스카우트하기로 마음을 정한다.

고교 선수 시절 국가 대표로 발탁되어, 김응룡·백인천 등과 어깨를 나란히 했던 최관수를 놓칠 수 없었던 이용일은 서울 대학교 상대 선배 정우창 은행장을 찾아가 군산으로 발령을 부탁하고 도와주겠다는 약속을 받아낸다. 그러나 1970년 7월 18일 경성 고무에 화재가 발생, 공장이 잿더미가 된다. 시민과 학생들은 모금 운동을 전개했고, 각계에서 화재 의연금이 들어왔다. 화재 보험도 받게 돼 빠른 복구가 가능했다.

그럼에도 이용일이 재정적으로 어려움에 빠질 것이라는 소문이 야구인들 사이에 나돌았다. 최관수 감독에게 다시 생각해보라며 만류하는 야구인도 있었다. 그러나 최관수는 형편이 어려워졌다고 약속을 어길 수 없다며 화재 1주일 후인 1970년 7월 25일 군산에 내려와 감독으로 부임한다. 최관수 감독의 지휘 아래 구슬땀을 흘린 선수들은 1971년부터 빛을 발한다.

군산상업고등학교는 1971년 5월 제 5회 대통령배 쟁탈 고교 야구 대회에 출전, 강호 중앙 고등학교와의 준준결승에서 예상을 깨고 6대 0으로 이겨, 호남 야구를 23년 만에 4강 대열에 올려놓는다. 8월에 열린 제 1회 봉황대기 쟁탈 대회에서는 우승팀 경북 고등학교와 2회전에서 격돌 14회 연장전 끝에 1대 0으로 패한다. 그러나 10월 서울에서 개최된 제 52회 전국 체육 대회에서 우승, 끝내 전국을 제패한다.

[황금 사자기, 호남선 열차에 싣고 군산으로 향하던 날]

1970년대 한국의 고교 야구를 사람들은 전국 시대(戦国時代)라고 했다. 『동아 일보』와 대한 야구 협회가 공동 주최한 황금 사자기 쟁탈 제 26회 전국 지구별 초청 고교 야구 쟁패전 결승 9회 말에서 군산상업고등학교가 극적인 역전승을 거두고 전국 고교 야구 패자(覇者)로 군림하는 데 성공한 1972년 이후부터다.

제 26회 황금 사자기 결승 진출팀은 영남의 강호 부산 고등학교와 창단 4년의 군산상업고등학교였다. 1972년 7월 19일 오후 7시 서울 운동장 야구장에서 군산상업고등학교는 1회 말 선취점을 뽑았지만 3회 초 1점, 8회 초 3점을 내주어 4대 1 패색이 짙었다. 하지만 9회 말 공격에서 6번 타자 김우근의 안타와 8번, 9번 타자의 연속 포볼로 1사 만루, 역전승의 발판을 마련한다.

다음 타자는 1번 김일권. 그가 몸에 맞는 포볼로 나가면서 4대 2로 따라붙었고, 계속되는 1사 만루에서 2번 타자 양기탁이 황금 같은 안타를 때려 4대 4 동점을 만들었다. 이어 타석에 들어선 3번 타자 김준환의 극적인 끝내기 좌전안타로 5대 4로 역전승했다.

군산상업고등학교의 선제 득점, 타이, 역전, 재역전 무려 네 차례나 엎치락뒤치락. 이날 경기는 한국 야구 100년사를 화려하게 수놓은 최고의 명승부로 남아 41년이 지난 오늘에도 야구 애호가들의 입에 오르내린다. 이날 김준환 선수는 끝내기 안타로 2시간 40분에 걸친 대장정에 종지부를 찍고, 고교 야구 역사를 바꿔놓았다.

당시 군산상업고등학교 진용은 감독 최관수, 부장 송경섭, 선수 김준환[주장·2루수], 김일권[유격수], 양기탁[중견수], 김봉연[1루수], 양종수[포수], 김우근[좌익수], 조양연[우익수], 정효영[3루수], 고병석[PH], 송상복[투수] 등. 이 대회에서 양종수는 최우수선수상, 송상복은 우수선수상, 양기탁은 수훈선수상, 최관수 감독은 지도상을 받았다.

1972년 황금 사자기 대회를 우승군산상업고등학교 선수들을 주축으로 이뤄진 한국 고교 대표팀은 그해 9월 일본으로 건너가 오사카[大阪]를 중심으로 간사이[関西] 지방에서 5차 친선 경기[종합 전적 4승 1패]를 치르고 21일 돌아온다. 당시 선수들은 히로시마 상고 자모회와 군산 출신 일인들의 뜨거운 환영을 받았다. 김준환 원광대 감독은 “가는 곳마다 학부모와 재일 교포들이 숙소를 제공해주는 등 열렬한 환영을 받았어요. 그때만 해도 일본에는 해방 전 군산에서 태어나 학교에 다녔거나 직장 생활을 했던 일본 사람이 많았다고 합니다. 그분들이 무척 친절하게 대해주었어요. 일제 강점기 야구 명문으로 알려진 군산 중학교[군산 고등학교] 출신들에게 글러브, 야구공, 배트 등 야구 장비도 선물 받았습니다.”라고 말했다. 군산상업고등학교의 극적인 황금 사자기 우승 이야기는 고교 야구 붐을 타고 1977년 7월 영화로도 만들어진다.

[군산상업고등학교의 눈부신 활약, 군산을 ‘야구의 도시’로 만들어]

제 26회 황금 사자기 우승으로 신화적인 ‘역전의 명수’를 창조하면서 ‘야구는 9회 말 투 아웃부터!’라는 말을 만들어낸 군산상업고등학교는 그 후 1972년 국회의장배 대회 우승, 1975년 제 56회 전국 체육 대회 우승, 1976년 제 10회 대통령배 대회 우승, 1982년 제 37회 청룡기 대회 우승, 1982년 제 12회 봉황대기 대회 우승, 1984년 제 39회 청룡기 대회 우승 등 전국 규모 대회만 우승 16회, 준우승 18회, 3위 10회를 기록하였다.

군산상업고등학교의 눈부신 활약은 군산을 ‘야구의 도시‘로 만들었다. 시민의 생활 패러다임도 바꾸었다. 어쩌다 고교 야구 친선 경기라도 열리면 경기장을 찾았고, 전국 대회 경기가 열리는 날에는 중앙로, 영동, 평화동 등 중심가는 정적이 감돌았다. 텔레비전이 귀하던 시절이어서 다방과 전파상 앞으로 모여들었기 때문이었다. 일부 택시 기사들은 길가에 차를 세워놓고 텔레비전 중계를 지켜보며 수준 높은 해설과 이론을 펼치기도 하였다.

결승전을 앞둔 날은 시내가 들끓었다. 우승이 확정되면 시내는 온통 축제 분위기. 다방에서 응원하던 사람들은 술집으로 이동, 서울에서 내려온 응원단과 밤새도록 이야기 꽃을 피웠고, 이튿날 거리에는 각양각색의 환영 현수막이 넘쳐났다.

서울에서 내려온 선수들은 35사단 지프차에 올라 전주 시내를 가르고, 도청 앞 광장에서 열리는 도민 환영 대회에 참석해서 뜨거운 환영을 받았다. 환영 대회를 마친 선수들은 오픈카에 올라 전주를 출발하여 이리에 들렀다가 군산에 도착, 팔마 광장, 도선장, 군산 서 초등학교를 돌아 째보 선창, 경찰서, 군산역 로터리, 군산상업고등학교, 금광동을 지나 시청 앞 광장에 도착했다. 거리에는 꽃가루가 뿌려졌고, 시민들은 환호했으며 선수들은 감격했다.

군산상업고등학교의 연이은 우승은 시내 어린이들의 꿈까지 바꿔놓았다. 골목의 공터에서는 ‘스트라이크!’ 소리가 요란했고, 차량이 뜸한 도로에는 ‘거리의 야구’가 등장했다. 선수층은 시멘트 포대로 만든 글러브와 빨래 방망이를 손에 쥔 8~12세 꿈나무들이 복잡한 야구 룰[rule]을 배우기 시작했고, 아빠들은 꼬마 선수들이 자전거를 넘어뜨려도 혼내지 않았다.

시민의 야구 열기와 사랑은 갈수록 높아졌다. 2013년 5월 말 현재 군산 야구 협회[회장 문태환]에 등록된 아마추어 야구팀만 56개[미등록 포함 70개], 동호인 2,500여 명은 각자 소속팀에서 선수로 맹활약 중이다. 또한, 중앙 초등학교, 남 초등학교, 신풍 초등학교의 초등학교 세 팀과 만 13세 이하로 구성된 리틀 야구단 한 팀, 군산 중학교, 군산남중학교의 중학교 두 팀, 고등학교로 군산상업고등학교 한 팀, 대학교로 호원 대학교 한 팀이 있다.

[참고문헌]
  • 『군산 시사』(군산 시사 편찬 위원회, 2000)
  • 『전북 체육 1백년사』(전라북도 체육회, 2002)
  • 인터뷰(이용일, 2013. 4. 10)
  • 인터뷰(김봉연, 2013. 4. 16)
  • 인터뷰(김준환, 2013. 4. 23)
  • 인터뷰(나창기, 2013. 4. 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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