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570043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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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白村江戰鬪 |
이칭/별칭 | 백강 전투,백강구 전투,기벌포 전투 |
분야 | 역사/전통 시대 |
유형 |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
지역 | 전라북도 군산시 |
시대 | 고대/삼국 시대 |
집필자 | 김종수 |
[정의]
663년 8월 현재의 전라북도 군산시 금강 하구 유역 일대에서 벌어진 백제 부흥군과 나당 연합군의 전투
[개설]
663년 쓰러진 나라를 일으키려는 백제 부흥군과 나당 연합군과의 전투로, 백촌강전투에서 백제 부흥군이 패배함으로써 백제가 완전히 멸망하게 되었다.
[역사적 배경]
660년 백제가 멸망한 이후 나당 연합군이 백제의 사비를 점령하고 백제 전역에서 노략질을 벌이면서 백제인들의 반발이 일어나고, 백제를 부흥 시키자는 움직임이 일어났다. 먼저 거병한 것은 임존성의 흑치상지이다. 흑치상지는 임존성에 근거지를 마련하여 백제 유민들을 모아 나당 연합군에 대항하게 된다. 흑치상지는 일단 당군이 주둔중인 사비성을 공격하였고 비록 당군의 저항으로 퇴각하긴 하지만 당군을 1만 명이나 죽이며 큰 활약을 한다. 곧이어 복신과 도침의 거병이 잇따랐다. 복신은 의자왕의 사촌 동생으로서 뛰어난 장수였고 도침은 승려 출신이었다. 이 둘은 백제 유민들을 모으는 한편 왜에 가있던 의자왕의 아들 부여풍을 왕으로 추대한다.
부흥군은 사비성 공격과 신라군 격퇴 그리고 백제 영토의 일부를 회복하는 등 초기에 큰 활약을 벌이지만 정비를 한 당나라의 장수 유인궤와 신라 무열왕이 직접 진압에 나섬에 따라 부흥군은 쇠퇴한다. 그 후 백제 부흥군 내부에서 분열이 일어나 복신이 도침을 죽인다. 이어서 복신은 반란을 노리다가 부여풍에게 암살된다. 이렇게 부흥군의 내분은 극에 달하고 부흥군의 약화로 이어진다.
[경과]
660년에 나당 연합군의 공격으로 백제의 수도 사비성이 함락되고, 의자왕을 비롯한 여러 왕족과 대신들이 당으로 끌려가고 당군의 약탈로 인하여 백제의 장수였던 귀실복신·흑치상지 등을 중심으로 백제 부흥 운동이 일어났다. 부흥군 지도자였던 복신은 당시 왜에 체류 중이던 백제의 왕자 부여풍을 옹립해 왕으로 추대하는 한편 왜에 원병을 요청했다. 대표적인 예로 백제 부흥군 지도자였던 귀실복신이 원병 요청과 함께 당시 왜국에 인질로 체류하고 있던 백제의 왕자 부여풍의 귀환을 요청하였다.
왜는 백제 부흥 운동에 파격적인 원조를 실시했는데, 천왕 사이메이[齊明]가 661년에 급서한 뒤에도 황태자였던 텐지[天智]가 즉위식도 미뤄가면서 부흥 운동 지원에 전력을 다하였다. 662년 1월에는 화살 10만 척과 곡식 종자 3천 석을 보내기도 하고, 두 달 뒤인 3월에는 추가로 피륙 300단을 보냈다.
663년 8월, 전권을 장악하고 있던 복신과 부여풍의 대립이 격화되어 결국 복신이 부여풍에게 살해당한 뒤, 부여풍은 다시 고구려와 왜에 사신을 보내 원병을 청했다. 귀실복신의 죽음과 백제 부흥군 지도부의 분열을 기회로 신라는 서둘러 백제 부흥군을 진압하고자 했고, 당은 웅진 도독부의 유인원의 증원요청에 따라 유인궤(劉仁軌)가 인솔하는 수군 7천 명을 파병했다. 육지에서는 당의 손인사(孫仁師)·유인원 그리고 신라의 문무왕이 이끄는 군사들이, 바다에서는 당의 두상(杜爽) 및 옛 백제의 태자였던 부여융(扶餘隆)이 이끄는 170여 척의 수군이, 수륙 협공으로 백제 부흥군의 수도 주류성으로 진격했다. 이때 육지에서는 백제의 기병이 진을 치고 신라군과 맞섰고, 바다에서는 왜에서 온 함선들이 강변의 모래밭에 정박해 있었다. 왜병 선단은 당군에 비해 수적으로 우세였음에도 네 번 모두 대패했다. 백강에 집결해 있던 1천척의 함선 가운데 4백 척이 불탔으며, 『삼국사기』는 이때의 싸움을 두고 “연기와 불꽃은 하늘을 붉게 물들였고, 바닷물마저 핏빛이 되었다.”고 당시의 상황을 묘사하고 있다.
[결과]
백제의 부여풍은 몇 사람의 측근만 거느린 채 배 한 척에 의지해 고구려로 달아나고, 백강에서 대패한 왜병은 각지에 흩어져 있던 왜병과 백제 유민들을 배에 싣고 귀국했다. 육지에서도 나당 연합군이 백제의 기병을 물리치고 주류성을 함락시킴으로써, 백제 부흥 운동이 막을 내리게 되었다.
[의의와 평가]
백제 부흥 운동의 마지막 전투이자, 동아시아 역사상 최초·최대의 국제 해전이었다. 비록 실패로 끝났지만 우리나라 역사상 최초의 대규모 국가 부흥 운동이었다는 점에서 의의가 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