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570044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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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高麗時代 |
분야 | 역사/전통 시대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
지역 | 전라북도 군산시 |
시대 | 고려/고려 |
집필자 | 김병남 |
[정의]
918년에서 1392년까지 고려 왕조가 지속되었던 시기 전라북도 군산 지역의 역사.
[개설]
757년(신라 경덕왕 16) 대대적인 행정 개편에 의해 군산은 임피군, 옥구현, 회미현으로 지명이 개정되었다. 이후 다시 고려시대에 옥구는 옥산으로, 회미는 연강으로, 임피는 취성현으로 변경되었고, 옥구현 옆에 문창현이 새로이 설치되어 네 개의 현이 존재했다. 그리고 고려 중기인 인종 21년에 문창현은 폐현되고 임피현의 기능이 중요시되어 김제 지역인 만경, 부윤(富潤)현 지역까지 관할하게 되었다.
『고려사』에 의하면 군산이라는 지명은 고려 후기에 와서 비로소 등장한다. 그것도 처음에는 군산도(群山島)라는 이름으로 나타나는 것으로 보아 오늘날의 군산 지역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고군산(古群山) 지역을 가리키는 지명으로 먼저 사용되었음이 분명하다. 이 지역을 가리키는 명칭으로서 군산이 등장하는 것은 이보다 훨씬 뒤인 조선 시대의 일이다.
[고려시대의 중심은 임피]
왕건은 후백제를 멸망시킨 뒤 940년(태조 23)에 지방 제도를 정비했는데, 1018년(현종 9) 임피군이 임피현으로 강등되어 현령이 설치되었으며 옥구·회미·부윤(富潤)·만경(萬頃) 등 4개 현을 속현으로 거느렸다. 이렇듯 고려시대에 군산의 중심이 되었던 곳은 오히려 임피현이었다. 임피현은 비록 고려 초에 현(縣)으로 강등된 처지였지만, 군(郡)으로 있었던 신라 때에 이어서 옥구현(沃溝縣)과 회미현(澮尾縣)을 그 속현(屬縣)으로 하여 관할하고 있었을 뿐 아니라, 부윤현(富潤縣)과 만경현(萬頃縣)까지도 관할하고 있었다.
당시 속현에는 수령이 파견되지 않았기 때문에 영현(領縣)인 임피의 현령이 옥구현과 회미현 등을 함께 다스려 나갔다. 여기에서 임피현은 물론 오늘의 군산시 임피면에 해당하며, 옥구현은 군산시 옥구읍 일대, 그리고 회미현은 군산시 회현면에 각각 해당한다. 그리고 부윤현과 만경현은 오늘의 김제시 만경읍 지역에 해당하는 곳이다. 요컨대 오늘날과는 달리 당시 임피현은 옥구현과 회미현의 상위 행정 구역으로서 이 지역의 중심지였던 것이다. 이같은 임피 중심의 행정 체제는 고려 말까지 거의 변함없이 지속되었다.
임피는 또 조창(漕倉)이 설치된 서해안의 요충지였다. 고려 정부는 농민들로부터 거두어들인 조세를 수도 개성으로 운반하는 조운(漕運)을 원활하게 하기 위하여 남도의 해안과 강가에 모두 12개의 조창을 설치하였는데, 그 중의 하나가 바로 임피의 조종포(朝宗浦)에 설치된 진성창(鎭成倉)이었다.
서기 990년 고려 왕조가 국가의 근본인 조세 제도를 시행하며, 임피의 조종포에 백성에게서 거두어들이는 세곡(稅穀)을 저장 운반하는 조운 창고를 설치하고 이후 전국 12조창의 한곳인 진성창을 임피현 창안에 설치하여, 군산은 서해 중부지역 물류유통의 중심지가 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군산의 역할은 1380년(우왕 6) 8월 왜구의 대규모 침입의 원인이 되었고, 군산은 최무선 장군이 세계 최초로 함포를 이용하여 왜선 500여 척을 무찌르는 진포 대첩의 현장이 되었다.
[국제 교역 통로, 군산]
‘군산’이라는 지명의 고향인 군산도[선유도]는 금강과 만경강, 동진강 물줄기가 한데 모이는 곳에 위치하여 줄곧 해상 교통의 중심역할을 했다. 백제 시대에 이어 고려시대에도 중국 왕조들과의 교류를 활발하게 하며 국제 외교의 관문으로서 큰 번영을 누렸다. 1123년 6월에 군산도를 방문한 송나라 사신 서긍이 편찬한 『선화봉사고려도경』에는 개경에 가는 길목인 군산도[선유도]를 방문한 사신일행과 이들을 영접한 김부식에 대한 기록이 나온다. 당시 군산도[선유도]의 망주봉 주변에는 숭산 행궁을 비롯하여 사신을 맞이하던 군산정, 바다신에게 제사를 드리던 오룡묘와 불교 사원인 자복사, 객관인 관아 등 많은 건물들이 있었다.
우리나라 서해안, 특히 군산 해역은 예부터 한·중·일을 연결하는 주요 해상로 일뿐 아니라 사신선, 또는 조세나 공물을 개경이나 한양으로 운반하는 조운선의 중요한 기항지였다. 따라서 군산 해역에는 많은 선박들이 왕래하였고, 풍랑에 의해 난파되는 선박도 많았다. 지금까지 우리나라 해역에서 유물이 발견, 신고된 곳은 230여 곳에 이르며, 이 중 183곳이 서해안에 해당된다. 또한 군산 지역에서는 20여 건 이상의 해저유물 발견 신고가 이루어졌으며, 이를 계기로 비안도·십이동파도·야미도 해역에서는 대규모 해저 유물 발굴이 이루어졌다. 이들 해저 유물은 이 지역이 과거 해상 물류 교통의 중심지였다는 것을 입증하는 증거들이다.
[고려시대의 유물과 유적]
군산 지역의 고려시대 문화 유적으로는 개정면의 발산리 석등[보물 제234호]·발산리 오층 석탑[보물 제276호], 용천 산성의 팔척 석불, 대야면 죽산리의 탑동 삼층 석탑[전라북도 유형 문화재 제66호], 서수면 취동리의 상주사 대웅전[전라북도 유형 문화재 제37호], 나포면 장상리의 불지사 대웅전[전라북도 유형 문화재 제117호], 그리고 선종암(善宗庵)의 삼층 석탑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