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570048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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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植民地地主制 |
분야 | 역사/근현대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
지역 | 전라북도 군산시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집필자 | 임혜영 |
[정의]
일제 강점기 군산 지역에서 나타났던 소수 대지주에 의한 토지 소유의 집중 현상.
[개설]
1876년 개항 이후 조선은 외래 자본 주의 체제에 강제 편입됨과 동시에 자본 주의 상품이 범람하면서 농촌 경제는 파괴되어 갔다. 특히 일본 상인에 의한 화폐 상품의 반입과 미곡 등의 물자 반출은 자급 자족 단계에 머물러 있던 조선 농촌 경제의 근간을 흔들 정도였다. 이러한 현상은 일본에 의한 식민지화가 진행되면서 더욱 심화되었는데, 특히 토지 조사 사업을 통해 일본은 자국의 지주제를 식민지에 이식함으로서 농촌 지배를 위한 토대를 마련하였다.
일제가 조선에서 토지 조사를 실시하려고 한 것은 통감부 설치 이후였다. 통감부 시대부터 토지 조사에 관한 논의를 시작했던 이유는 일본인 토지 소유를 합법화하기 위해서였다. 원래 조선에서는 외국인의 토지 소유가 법적으로 금지되었음에도 일본인들은 개항장 주변을 시작으로 점차 소유지를 확대해나갔다. 그리하여 대농장을 설립할 정도에 이르렀지만 일본인들은 토지 소유권을 인정받지 못했다. 일본인의 토지 소유를 합법적으로 보장하기 위해서는 법 제도의 정비가 시급했던 것이다. 이러한 문제를 일시적으로 해결하기 위해 1906년(광무 10) ‘토지 가옥 증명 규칙’, 1908년(융희 2) ‘토지 가옥 소유권 증명 규칙’이 공포되었다. 그러나 이 제도에 의해 증명을 받은 토지의 소유권은 불완전했으므로 토지 등기 제도를 완비하여 문제를 해결하려 했다.
토지 조사 사업을 통해 조선 왕실의 많은 토지가 조선 총독부 소유지로 되어 일본 농업 및 농민이 조선에 침투하게 되었다. 이 과정에서 조선의 농민 중에는 경작지를 잃고 소작인으로 전락한 자가 많았으며 일본인 지주의 토지 집적 과정은 광범위하게 이루어졌다. 그리고 그들의 소작제 농장 경영 방침은 대지주 중심의 왜곡된 한국 농촌 구조를 심화시켰다. 지주-소작 관계는 소작인이 일방적으로 불리하게 이루어지게 되었다.
토지 조사 사업이 식민지 지주제를 법률적으로 보장한 식민지 재편 정책이었다면 산미 증식 계획은 식민지 지주제를 근간으로 유지하면서 부가적으로 쌀 증산에 박차를 가하는 것이었다. 결국 식민지 농업 정책에서 야기된 미곡 단작 지대의 확산과 토지 불균형의 문제로 농촌은 더욱 피폐해져 갈 수밖에 없었다. 일제는 토지 조사 사업과 산미 증식 계획을 통하여 지주들을 포섭하였고 지주들은 농촌 사회의 대리 지배자로 군림하였다. 농민들은 일제와 지주로부터 이중적인 지배를 받아야했던 것이다. 따라서 식민 당국의 보호를 받는 지주들의 권한은 강해지는 반면 상대적으로 소작농의 권한은 위축되어 이제 소작권마저도 안정되지 못하였다.
결국 식민지 지주제는 1929년 농업 공황을 계기로 토지 소유의 불균형에 따른 농민 투쟁으로 위기를 맞이하게 되었다. 농가 경제의 피폐로 인한 소작 쟁의의 격증 현상은 식민지 지주제가 심각하게 동요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군산의 일본인 대지주]
한일 병합 이전에 조선에 진출한 일본인 농사 경영자는 경상남도, 경기도, 전라남도, 전라북도에 많이 분포하였고 그 중에서도 약 297,520㎡ 이상 지주가 많은 곳은 경상남도, 전라북도, 전라남도 순이었다. 도시로 보면 군산, 목포, 부산 순이었는데 특히 군산 지역에는 10만 원 이상을 투자한 거대 지주 7명이 모두 123,966,942㎡의 토지를 소유하였다. 병합 이후에도 대지주의 수와 그들이 소유한 토지는 계속 증가하였다.
군산의 대표적인 일본인 지주로는 구마모토 리헤이[熊本利平], 가와사키 토타로[川崎藤太郞], 시마타니 야소야[島谷八十八], 미야자키 케이타로[宮崎佳太郞] 등이 있다. 구마모토 리헤이는 나가사키 현[長崎縣] 출신으로 1902년(광무 6) 농장 지배인으로 조선에 진출하여 1903년(광무 7)에는 농장 지배인으로부터 독립하여 자신의 농장을 개설하였다. 그 후 본격적으로 토지를 매수하여 1910년(융희 4)에 약 14,876,033㎡를 경영하고 1932년에는 대창(大倉) 지경 농장으로부터 토지를 구입해 약 29,752,066㎡까지 집적하였다. 1937년에는 본인 등 7명을 발기인으로 하는 주식 회사 웅본(熊本) 농장을 창설하여 그 회사의 토지를 관리·경영하였다.
가와사키 토타로는 니가타 현[新潟縣] 산토군[三島郡] 출신으로, 한국에서 농장을 경영할 목적으로 인천을 통해 1904년(광무 8)에 들어왔다. 그는 전국 각지를 시찰하다가 남부 지역에서 농장을 경영하기로 결정하였다. 그리하여 군산 이사청의 보호 아래에 일본인 토지 매수에 대한 일종의 공익적 보증을 하기 위해 설립된 군산 농사 조합을 통해 농지를 구입하였다. 그리고 1904년(광무 8) 11월 서수면 지역의 경지 900여 두락을 구입하여 본격적으로 농장을 개설하였다. 1909년 이미 농장 규모는 군산부, 옥구군 등지에 답(畓) 약 3,570,247㎡, 전(田) 약 842,975㎡, 합계 약 4,413,223㎡에 이르렀다. 그러나 그는 평안북도 정주에서 시작한 간척 사업이 순조롭게 진행되지 못해서 이엽사(二葉社)에 토지를 모두 넘겼다.
시마타니 야소야는 야마구치 현[山口縣] 출신으로 1903년 조선으로 건너와 옥구군 개정면에 농장을 개설하였다. 1904년(광무 8) 3월 현재 답(畓)과 전(田)을 합해 약 4,264,462㎡, 임야(林野) 약 793,388㎡를 소유하였다고 하니 빠른 시간 안에 급속도로 토지를 매수하였음을 알 수 있다. 시마타니는 농장을 직접 경영할 뿐만 아니라 위탁 관리도 맡았는데 1936년 기준 시마타니의 경영·위탁지는 약 12,892,562㎡에 달했다. 도곡(島谷) 농장에서는 소작인에게 우량 품종을 생산하게 하였는데 도곡 농장에서 생산한 쌀은 일본 오사카[大阪] 시장에서 항상 최고가로 거래되었다.
[한국농민의 저항]
농촌은 지주들의 농장이 확대되고 식민 지배가 계속되면서 토지에서 떨어져나가는 빈민층이 늘어나고 춘궁기에 겨우 연명하는 농민이 급증하는 상황이었다. 그런데도 지주들의 횡포는 여전하였고 농민들은 자신들의 목소리를 낼 수밖에 없었다. 군산 지역의 대표적인 농민 운동은 1927년 발생한 이엽사(二葉社) 쟁의이다.
서수면에 있는 이엽사 농장이 1927년 75%의 소작료를 징수하려 하자 옥구군 농민조합에서는 소작료의 인하를 농장 측에 요구하였다. 이런 상황에서 1927년 11월 25일 옥구 주재 소원이 옥구 농민 조합 서수 지부 위원장 장공욱 등 2명을 체포 구금하였다. 이에 조합원들이 경찰 주재소를 습격 파괴하고 간부를 구출했다. 응원 요청을 받은 군산 경찰서는 무장 경찰대를 동원하여 조합원 간부 등 36명을 체포하여 군산 경찰소로 압송하였다. 서수 지부 조합원들은 군산에 진출하여 간부의 석방을 요구하며 시위 운동을 전개하자 이에 동조한 노동자·학생들이 합류하여 경찰서에 쇄도하였다. 결국 강경 탄압으로 방침을 정하고 조합원 80여 명을 체포, 51명이 소요 및 구금자 탈환죄로 군산 검사국에 송치되었고 34명이 기소되었다.
이 때 김병로가 변론을 무료로 맡아주었고 조선 농민 총동맹, 노동 총동맹에서 조사단을 파견, 서수 농민들을 위로하는 등 조선 전체 농민의 호응을 받았다. 그러나 정치적, 조직적 지도가 약하여 1930년대까지 독립 투쟁으로 이어지지 못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