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570088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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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安東金氏 |
분야 | 성씨·인물/성씨·세거지 |
유형 | 성씨/성씨 |
지역 | 전라북도 군산시 회현면 |
집필자 | 김두헌 |
입향 시기/일시 | 15세기 후반 - 김윤경, 고산에서 옥구로 입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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묘소|세장지 | 죽동 마을 - 전라북도 군산시 세장리 죽동 마을 |
성씨 시조 | 김방경(金方慶) |
입향 시조 | 김윤경(金允勁) |
[정의]
조선 시대 군산 지역[옛 옥구현]에 세거한 성씨.
[개설]
안동김씨(安東金氏) 시조 김방경의 9세손인 김윤경(金允勁)이 15세기 후반에 고산에서 옥구로 입거한 이후, 후손들이 옥구현 일대에 집성촌을 이루며 세거하여 왔다. 이들은 자신들을 안동김씨 문온공파라고 부르고 있다.
[연원]
안동김씨(安東金氏) 시조 김방경(金方慶)은 1212년(강종 1)에 태어났고, 1300년(충열왕 26)에 사망하였다. 삼별초의 난을 진압하는데 큰 공을 세웠고, 제2차 일본 원정에 도원수로서 참여하는 등, 고종, 원종, 충열왕 등 세 조정에서 공을 세웠다. 관직이 첨의중찬, 상장군, 판전리감찰사사, 세자사 등에 이르렀다.
[입향 경위]
안동김씨(安東金氏) 시조 김방경(金方慶)의 9세손이고, 문온공 김구용(金九容)의 현손인 김윤경(金允勁)이 15세기 후반 경에 고산에서 옥구로 입거하였다. 김윤경의 고조와 증조의 묘는 경기도 포천에 있고, 조부와 부(父)의 묘는 각각 전북 익산과 고산에 있다. 따라서 김윤경의 고조부터 김윤경까지 거주지가 포천→익산→고산→옥구로 이동한 것으로 보인다. 김윤경이 옥구에 입거한 시기는 아버지 김자완(金自垸)[1425~1457]의 생몰 연도로 보아 15세기 후반 경으로 추정된다. 김윤경의 묘는 회현면 세장리 죽동의 수원지 역내에 있었다. 관직은 통덕랑(通德郞) 한성판관(漢城判官)을 지냈고, 좌리공신(佐理功臣)으로 책봉되었다.
[현황]
김윤경(金允勁)이 옥구에 입거한 이후 맏아들 김수팽(金壽彭)은 전북(全北) 익산(益山)으로, 삼자(三子) 김수정(金壽貞)은 충청도 회덕으로 각각 이주하였고, 차자(次子) 김수담(金壽聃)과 후손들이 옥산면 금성리에 집성촌을 이루며 세거하여 왔다. 이들은 자신들을 문온공파라고 불렀는데, 문온(文溫)은 김윤경의 고조 김구용(金九容)의 시호(諡號)이다. 차자(次子) 김수담(金壽聃)의 처부(妻父)는 무장 김씨(茂長金氏) 김부석(金負石)[1447~1509]이다. 김부석(金負石)은 옥구에 비로소 입거한 무장 김씨(茂長金氏) 김자진(金自珍)의 손자이다. 곧, 김수담(金壽聃)만 옥구(沃溝)에 계속 거주한 가장 큰 이유 중에 하나는 처가(妻家)가 옥구에 있었기 때문이었다.
1990년에 발간된 『옥구 군지(沃溝郡誌)』에 의하면, 당시 금성 마을에 안동김씨가 10가구 42명이 살았다고 한다. 1990년 이후 군산 지역에 거주하는 안동김씨 현황에 대해서는 조사된 사례가 없어 파악하기 어렵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