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570124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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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蔡金錫 |
분야 | 문화·교육/체육,성씨·인물/근현대 인물 |
유형 | 인물/인물(일반) |
지역 | 전라북도 군산시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현대/현대 |
집필자 | 조종안 |
출생 시기/일시 | 1904년 4월 9일 - 채금석 출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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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동 시기/일시 | 1929년 - 채금석 광주 학생 항일 운동 참여로 퇴학 |
활동 시기/일시 | 1934년 - 채금석 조선 대표 선수로 발탁 |
활동 시기/일시 | 1935년 - 채금석 조선 대표 경성팀 선수로 발탁 |
몰년 시기/일시 | 1995년 12월 26일 - 채금석 사망 |
추모 시기/일시 | 1992년 - 제1회 금석배 축구 대회 개최 |
출생지 | 채금석 출생지 - 전라북도 군산시 구암동 260-1 |
성격 | 체육인 |
성별 | 남 |
대표 경력 | 조선 축구 대표 선수 |
[정의]
전라북도 군산 지역 출신의 축구 선수.
[개설]
채금석의 별명은 ‘오토바이’이다. 1904년 4월 9일 전라북도 군산시 구암동 260-1에서 태어났다. 코흘리개 시절 공차기를 밥보다 좋아했던 채금석의 축구 인생은 군산 영명 학교[현 군산 제일 고등학교] 축구부에 입단하면서 시작된다.
[활동 사항]
영명 중학교 선수 시절 전라북도 군산 지역 최초 체육 단체인 평화 축구단 선수로 뛰었고, 전국 규모 축구 대회[1922년, 1923년, 1924년]에 연속 출전하여 이름을 떨쳤다. 실력을 인정받아 1925년 서울 경신 중학에 진학, ‘라이트 윙’으로 제 9회, 제 10회 전 조선 축구 대회 2연패와 조일 신문사 주최 제3회 전 조선 축구 대회 우승 등 수많은 대회에서 맹활약하며 주목을 받았다.
경신 중학 4학년 재학시절 광주 학생 항일 운동[1929]에 참여했다가 퇴학 처분을 받는다. 그러나 축구에 대한 열정은 식지 않아 경평[서울·평양]전에 출전, 한국의 축구왕 김용식 등과 어깨를 나란히 뛰면서 승리의 주역이 된다. 스피드가 뛰어났던 채금석은 그 후 ‘오토바이’라는 별명을 얻으며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축구 선수가 된다.
1934년에는 조선 대표 선수로 뽑혀 중국에 원정, 천진(天津)에서 영국·러시아·중국 대표팀과 북경 보인 대학팀과 경기에서 5전 4승 1패의 기록을 올렸다. 1935년에는 조선을 대표하는 경성팀 선수로 선발되어 일본에서 개최된 제8회 명치 신궁 경기 대회 겸 베를린 올림픽 선발전에 출전해서 우승했으나 일본인들은 조선팀이라고 해서 파견하지 않았다.
일본, 만주 등에서도 ‘오토바이’로 명성을 높이던 채금석은 해방과 함께 고향으로 낙향하여 일명 ‘구암 축구단’을 구성하면서 제2의 축구 인생이 시작된다. 그는 시내 초등학교 선수들 개인 코치를 자임하면서 53세에 전국 체전 전북 대표로 출전할 정도로 축구 사랑 정신을 발휘했다. 1985년에는 경신 고등학교에서 명예 졸업장을 받았다.
채금석은 선수로서 뿐만 아니라 장래가 촉망되는 중학교 선수를 자비를 들여 서울로 진학시키는 등 후진 양성에도 온힘을 쏟았다. 해방 후 전라북도 군산에 내려온 그가 숨을 거둘 때까지 키워낸 청소년 및 국가 대표 선수를 지낸 제자만 최재모, 김승철, 정태훈, 박문갑, 강철, 유동춘, 노수진, 김이주 등 20명 가까이 된다.
경신 중학 시절 단짝이자 맞수였던 김용식과 술, 담배, 도박, 잡기, 여자를 멀리하고 40대까지 선수로 뛸 것이란 약속을 숨을 거둘 때까지 지켰을 만큼 축구를 위해 청교도적인 삶을 살았다. 대한민국 축구사에 큰 족적을 남긴 채금석은 1995년 12월 26일 사망하였다.
[상훈과 추모]
전북 축구 협회는 한국 축구사에 큰 족적을 남긴 채금석을 위해 1992년부터 실명을 딴 ‘금석배 전국 축구 대회’를 개최하기 시작해 올해로 22회를 맞이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