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3000285 |
---|---|
한자 | 衿州 |
영어음역 | Geum-ju |
분야 | 역사/전통 시대 |
유형 | 제도/법령과 제도,지명/고지명 |
지역 | 서울특별시 구로구 |
시대 | 고려/고려 |
집필자 | 윤대준 |
[정의]
940~1413년 구로 지역에 설치된 고려시대의 지방 행정 구역.
[개설]
본래 고구려 잉벌노현(仍伐奴縣)인데, 신라 경덕왕이 곡양현(穀壤縣)으로 고쳤다. 고려 초에 금주(衿州)라고 고쳤고 성종이 단련사(團練使)를 설치하였는데, 목종이 혁파하였다. 1018년(현종 9) 수주현(樹州縣)[현 부천시 일대]에 예속되었고 명종 때 비로소 감무(監務)가 설치되었다.
[관련기록]
『고려사(高麗史)』 권94 강감찬전에 “강감찬의 옛 이름은 은천(殷川)인데 금주 사람이다. 그의 5대조 강여청(姜餘請)이 신라 조부터 시흥군(始興郡)으로 옮겨와 사니 시흥은 즉 금주이다”라고 하였다. 즉 강여청이 살았던 신라 말 고려 초 시기에 금주는 시흥이라고도 불렸음을 알 수 있다. 실제로 『세종실록지리지(世宗實錄地理志)』에 금천(衿川)의 별호를 시흥으로 하였다는 기사가 있다. 『경기도읍지(京畿道邑誌)』와 『세종실록지리지』에는 금천으로 표기되어 있으나,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에는 금주로 기록되어 있다.
[내용]
금주는 삼국시대에 처음 백제의 영토였다가, 고구려 장수왕의 남진 이후에는 잉벌노현이라고 불렸다. 이후 757년 경덕왕 대에 곡양현·장구현(獐口縣)·율진군(栗津郡)으로 바뀌었고, 곡양현은 율진군의 영현(領縣)이 되었다. 고려 건국 후 940년(태조 23) 곡양현은 금주(衿州, 黔州)로, 율진군은 과주(果州)로, 장구현은 안산현(安山縣)으로 고쳐졌는데 금주는 지금의 서울특별시 구로구와 인접 지역인 광명시, 금천구 시흥동의 대부분을 포괄하는 지역이었다.
995년 성종 대에 지방 제도를 대폭 개편하여 전국을 10도제로 하였는데, 양주(楊州)·광주(廣州)·황해(黃海) 등 여러 주·현을 합하여 관내도(關內道)라 하였고, 이때 관내도에 소속된 금주를 다스리는 지방관으로 단련사를 두었다가 1005년(목종 8)에 혁파하였다. 1018년(현종 9)에는 5도 양계 제도를 도입하여 지방 제도를 정비할 때 개경 주위에 경기(京畿)를 설치하여 개성부를 포함 모두 10개 현으로 구성하였다.
이때 구로구 지역은 경기 10현 중 하나인 수주현에 예속되었다. 이후 1172년(명종 2)에 비로소 지방관인 감무를 두었는데, 이전에는 호장(戶長)이 수령(守令) 격이 되어 통치하면서 간접적으로 중앙 정부의 관할을 받는 형태를 취하지 않았을까 생각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