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6000444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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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칭/별칭 | 답교(踏橋) |
분야 | 생활·민속/민속 |
유형 | 놀이/놀이 |
지역 | 광주광역시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정혜정 |
성격 | 민속놀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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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는 시기 | 정월대보름 |
[정의]
광주광역시에서 정월대보름 날 밤에 다리[橋]를 밟는 민속놀이.
[개설]
정월대보름 날 밤에 다리[橋]를 밟으면 1년 동안 다리병을 앓지 않는다고 한다. 따라서 열두 번 다리를 밟아 지나가며 열두 달 동안 액을 면하기를 바라면서 남녀노소 모두 다리를 밟았는데, 이것을 다리밟기[踏橋]라고 한다.
[연원]
이수광의 『지봉유설(芝峯類說)』에 의하면 정월대보름 날 밤에 다리밟기를 하는데, 이것이 고려 때부터 시작된 풍속이라 하고 이름이 '답교지희(踏橋之戱)'라 적고 있다. 태평한 때에 있어서 매우 성행하여 남자와 여자들이 극성스럽게 붐벼 밤을 새우며 그치지 않아 금하기까지 하였다고 한다. 유득공은 『경도잡지(京都雜誌)』에 중국인의 다리밟기 민속 기록을 인용하고 우리의 다리밟기 민속의 근원을 중국에서 유래하였다고 하였다. 중국에서는 이를 액막이(度厄), 또는 주백병(走百病)으로 표현하고 있다. 우리나라에서 다리밟기를 하면 다리병을 앓지 않는다고 생각한 것은 다리[脚]와 다리[橋]의 발음이 같은 데서 생긴 속신적 관습이며, 언어질병적(言語疾病的)인 심리가 작용한 결과로 생각된다. 홍석모의 『동국세시기(東國歲時記)』에는 "옛날 한양에서는 저녁에 종이 울리면 사람들이 거리로 나와 다리밟기를 하였는데, 사람들이 너무 많아서 혼잡을 이루었고, 수표교와 광교가 가장 심해서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사람들이 한꺼번에 쏟아져 나와서 혼잡하였기 때문에 점잖은 양반들과 부녀자들은 혼잡을 피하기 위해서 14일 저녁에 미리 다리밟기를 하거나, 16일 저녁에 하기도 하였다."고 기록되었다.
다리밟기는 답교놀이로 발전하여 농악을 치거나 이에 맞춰 소리를 하고 춤을 추고 즐기게 되었다. 광주광역시에서는 다리밟기가 그다지 성행하지 못하였다. 문헌에 광산구 비아동에서 행해졌었다는 기록은 있으나, 현재 그곳은 광주첨단과학기지 개발로 인해 현장이 사라져 조사가 어려운 형편이다.
[놀이 도구 및 장소]
다리밟기는 다리를 밟고 건너가야 하는 놀이로 강이나 시내 위에 설치된 다리[橋]에서 행하여졌다.
[놀이 방법]
정월대보름 날 저녁에 다리밟기를 할 때 가족끼리 조용히 다리를 밟기도 하고, 마을 청소년들이 몰려다니면서 다리를 밟기도 하였다. 또 삼현육각(三絃六角)[향피리 2·젓대 1·해금 1·북 1·장구 1로 구성되는 악기 편성의 총칭]을 갖추어 풍악을 울리면서 원님 행차 모습을 본떠 가장행렬을 하면서 다리를 건너기도 하였다.
[생활 민속적 관련 사항]
다리밟기는 정월대보름 날 밤에 다리[橋]를 밟으면 신체 다리[脚]에 병이 없다고 믿어 행하여진 놀이이다. 강이나 시내 위에 설치된 다리는 사람이 지나가거나 무거운 수레가 지나가도 무너지지 않고 튼튼하다. 사람의 다리와 같은 음(音)인 튼튼한 다리를 밟으면 사람 다리도 역시 튼튼해질 것이라는 믿음에서 비롯된 놀이라 할 수 있다.
[현황]
다리밟기가 광주광역시 광산구 비아동에서 행하여졌다는 기록은 있으나, 이 지역에서 성행하지는 못하였다. 현재는 전혀 행하여지지 않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