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60004365 |
---|---|
한자 | 大支洞上村-堂山祭 |
이칭/별칭 | 대지동 상촌마을 동제 |
분야 | 생활·민속/민속 |
유형 | 의례/제 |
지역 | 광주광역시 남구 대지동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부유진 |
중단 시기/일시 | 1910년대 일제강점기 초 - 대지동 상촌마을 당산제 중단 |
---|---|
의례 장소 | 할아버지당산 - 광주광역시 남구 대지동 상촌마을 앞 동쪽 |
의례 장소 | 할머니당산 - 광주광역시 남구 대지동 상촌마을 앞 서쪽 |
성격 | 마을 공동 제사 |
의례 시기/일시 | 정월 열나흗 날 밤부터 대보름 날 새벽까지 |
신당/신체 | 할아버지당산[느티나무]|할머니당산[느티나무] |
[정의]
광주광역시 남구 대지동 상촌마을에서 마을의 안녕과 풍요를 기원하기 위해 정월 열나흗날 밤부터 대보름날 새벽까지 지내는 마을 공동 제사.
[개설]
대지동 상촌마을 당산제는 정월 열나흗 날부터 대보름 날 새벽까지 상촌마을의 할아버지당산과 할머니당산에서 마을의 안녕과 풍요를 기원하며 마을 공동으로 지내는 제사이다.
[연원 및 변천]
상촌마을은 13세기 말에 광산김씨(光山金氏), 여흥민씨(驪興閔氏), 영성정씨(靈城丁氏) 등의 이주와 정착으로 형성되었다. 당산제를 지낸 최초 시기는 특정하기 어려우며, 일제강점기에 중단되어 현재는 진행되고 있지 않다.
[신당/신체의 형태]
상촌마을의 당산은 할아버지당산과 할머니당산 두 곳이며, 마을 앞에 있는 느티나무가 신체 역할을 한다. 할아버지당산은 동쪽에 있는 느티나무이고, 할머니당산은 서쪽에 있는 느티나무이다.
[절차]
대지동 상촌마을 당산제는 정월 7~9일 사이에 마을 회의를 열어 제관(祭官)을 선정하는데, 생기복덕(生氣福德)[생기법으로 본 길일과 사람이 태어난 생년월일의 간지를 팔괘로 나누어 가린, 길한 일진의 날]을 보아 깨끗한 사람으로 뽑는다. 이때부터 제관은 궂은 곳을 가거나 궂은 음식을 먹어서도 안 된다. 화주는 제수(祭需) 마련을 비롯한 제사 전반을 관여하기 때문에 매일 찬물로 목욕해야 하고, 용변 후에는 반드시 목욕재계해야 한다. 제비(祭費)는 걸궁(乞窮)[자금을 마련하기 위해서 마을 집집을 돌아다니며 악기를 연주하거나 축원의 노래를 불러주는 일]으로 마련한 마을 자금으로 충당한다. 제기(祭器)는 매년 새로 구입하고, 제사 후에 화주가 갖는데 다른 사람이 빌려 쓸 수 없다. 정월 11~12일 사이에 당산 주변과 화주집 앞에 금줄을 치고 금토를 놓아 부정의 출입을 막는다. 제수는 제일(祭日) 오전부터 화주집에서 화주 부인이 장만하는데 맛을 봐서는 안 되며, 마늘, 고춧가루 등은 일절 사용하지 않는다.
제일 오전부터 굿을 치며 놀다가, 밤이 되면 화주집으로 가서 제물(祭物)을 가지고 제관과 함께 당산으로 향한다. 할아버지당산, 할머니당산 순으로 제사를 모신다. 제차(祭次)는 가정에서 지내는 제사와 유사하며, 제관은 검은 두루마기에 유건을 쓴다. 소지, 음복, 헌식은 간략하게 하며, 여성은 소지에 참여하지 못한다.
[축문]
마을의 안녕을 기원하는 내용의 축문을 읊었다고 하나, 구체적인 내용은 확인할 수 없다.
[부대 행사]
당산제가 끝나고 대보름 날 저녁부터 그믐 날까지 걸궁이 계속되는데, 마을 사람들은 이를 '논다'고 한다. 이때 음식과 술 등을 내어놓아 날이 새도록 먹고 굿을 치면서 논다.
[현황]
대지동 상촌마을 당산제는 일제강점기 초에 일제의 탄압으로 중단되어 현재는 진행되고 있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