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8100004 |
---|---|
한자 | 慶山-渤海-後孫-渤海- |
분야 | 지리/인문 지리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
지역 | 경상북도 경산시 남천면 송백리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이창언 |
[정의]
경상북도 경산시 남천면 송백리의 발해 후손들이 모여 살고 있는 발해마을 이야기.
[개설]
태씨(太氏)는 발해(渤海)를 건국한 대조영(大祚榮)의 아버지 진국공(震國公) 대중상(大仲象)을 시조로 하고 있으며, 본관으로 협계(陜磎)와 영순(永順) 등 두 본이 있다. 대중상은 나당연합군에 의하여 고구려가 멸망하자, 고구려의 유장이었던 아들 대조영과 함께 696년(신라 효소왕 5)에 옛 고구려 영토에 발해의 전신인 진국(震國)을 건국하였다.
발해는 한때 ‘해동성국(海東盛國)’이라 불릴 만큼 융성하였으나, 926년에 거란에게 패망하였다. 이후 세자 대광현(大光顯)이 수만의 유민과 함께 고려 태조의 예우를 받으며 귀순하여 고려에 정착하였다. 협계 태씨(陜磎太氏)와 영순 태씨(永順太氏)는 각각 고려 고종 때 몽골군의 격퇴에 공을 세워 협계군에 봉해진 태집성(太集成)과 영순군에 봉해진 태금취(太金就)를 중시조로 하고 있다. 영순군 태금취의 후손들은 협계 태씨에서 분적하여 본관을 영순으로 하여 세계를 이어 왔다.
경산시 남천면 송백리 발해마을은 대중상을 시조로, 태금취를 중시조로 하는 영순 태씨의 동성마을이다. 영순 태씨의 주요 인물로는 조선 중종 때에 문신이었던 서암(西庵) 태두남(太斗南)이 있다. 태두남은 1513년(중종 8) 문과에 급제한 뒤에 내직과 외직을 두루 거쳤으며, 회재(晦齋) 이언적(李彦迪)을 비롯한 당대 인사들과 친교를 쌓았던 청렴하고 강직한 청백리였다.
발해를 건국한 조상을 시조로 하는 태씨는 현대에서도 많은 인물을 배출하였다. 이런 인물 가운데 부총리 겸 경제기획원 장관을 역임한 태완선, 대구시장과 충북지사를 지낸 태종학, 경산읍장을 지낸 태종수 등이 있다. 남한에 1,700여 가구에 7,000여 명의 동성원이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대씨에서 태씨로 성이 바뀐 것과 관련하여 몇 가지 유래설이 있다. 고려 현종 무렵에 대조영을 ‘태조영’으로 기록하면서 자연스럽게 태씨가 되었다는 설과 이보다 앞서 발해의 멸망으로 고려에 귀순할 때 고려 태조가 태씨를 사성(賜姓)하였다는 설이 있다. 현재 송백리에는 20여 가구에 30~40여 명의 후손들이 세거하고 있다.
[발해 후예들의 경산 정착]
고려 고종 때 몽골군의 격퇴에 공을 세워 영순군에 봉해진 태금취는 상주의 임하촌에 터를 잡았다. 고려 시대 상주의 임하촌은 지금의 경상북도 문경시 영순면 일대를 가리킨다. 이후 7세 태영길(太英吉) 대에 경상북도 예천으로 이거했으며, 다시 13세 대에 이르러 여러 곳으로 분거하였다.
그 가운데 태순민(太舜民)의 자손들은 충청북도 옥천으로, 태순수(太舜壽)의 후손들은 현재까지 예천에 세거하고 있다. 태순개(太舜凱)의 자손들은 경기도 양주로, 태순원(太舜元)의 후손들은 경상남도 창원과 강원도 홍천 등지로 산거하였다.
태순금(太舜琴)은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지금의 경상북도 경산으로 이거하였다. 이상에서처럼 영순 태씨는 중시조가 상주에 터를 잡으면서 이후 경상북도 예천과 경산 일대에서 후손들이 정착하여 동성마을을 이루었다.
송백리의 발해마을에는 영순 태씨 중시조인 태금취의 13세손인 태순금이 임진왜란 당시 현재 경산시 상방동에 정착하였다가 이후 송백리로 옮겨 후손들이 400여 년 세거하고 있다.
1950년대에 송백리는 60여 호에 이르렀다가 이후 이농현상으로 인구가 감소하여 현재는 그 절반에 머물고 있다. 그럼에도 송백리는 전국적으로 찾아보기 힘든 영순 태씨 동성마을 가운데 한 곳으로 유지되고 있다. 경산 지역의 영순 태씨는 송백리 외에 자인면 등지에 30여 가구가 거주하고 있다.
[발해마을을 통해 본 발해 계승 의식]
영순 태씨의 동성마을인 송백리에서는 시조에 대한 향사를 비롯하여 해동성국 발해를 건국한 대조영의 위업을 기리는 사업을 전개하고 있다. 송백리는 2010년대 들어 정부의 각 부처와 지자체에서 시행하는 농촌체험 휴양마을사업과 연계하여 시조의 현양과 마을의 활성화를 도모하기 위한 사업을 시행해 왔다.
농촌체험 휴양마을사업은 마을협의회가 마을의 자연과 문화를 활용하여 이용자들의 생활 체험 및 휴양공간을 제공하고, 지역 특산물 판매와 음식 및 숙박업 등의 서비스를 제공하는 사업이다.
송백리의 영순 태씨들이 발해의 건국이라는 역사적 위업을 바탕으로 농촌체험 휴양마을사업을 전개하면서 송백리는 경산의 ‘발해마을’로 거듭나고 있다. 후손들은 무엇보다도 매년 춘분과 추분에 행하는 향사 봉행에 정성을 다한다. 송백리의 영순 태씨들은 17세기 초반에 상현사(尙賢祠)를 건립하였고, 1920년대에 중건하였다. 이곳에서 춘분과 추분에 대제를 봉행해 오다가, 1960년대부터는 한동안 춘분에만 향사를 지냈다.
근래 대조영의 위업과 발해마을 조성과 관련하여 한동안 매년 한차례 배향한 향사를 2015년부터 다시 춘추향사로 복원해 제향하고 있다. 이에 발해를 건국한 1대 고왕 대조영을 비롯한 발해의 왕을 역임한 14위를 포함하여 모두 19위에 대한 향사를 매년 봄과 가을에 봉행하고 있다.
후손들은 선조들의 위업을 기리는 향사를 본래의 모습대로 행하기 위한 노력을 병행하여 2012년에는 발해 고왕 대조영의 표준영정을 학계와 관련업계의 전문가들에 의뢰해 제작하였다. 이를 위해 전국에 거주하는 태씨 남성 142명의 얼굴 사진을 바탕으로 그 특징을 분석하여 두상을 만들기도 했다. 이렇게 제작된 두상을 기초로 하여 미대 교수가 영정을 완성하였다.
표준영정의 제작은 용모와 관련된 유전자의 수가 적어 후손에게 잘 물려지는 점을 고려하였고, 자료를 수집하고 제작하는 작업이 석 달 간 진행되었다. 대조영 표준영정의 한 폭은 상현사에, 그리고 다른 한 폭은 정부 표준영정 제86호로 지정되어 서울대학교 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
송백리의 영순 태씨들은 상현사의 향사에 정성을 기울이는 한편으로 발해마을을 조성하기 위한 노력도 기울이고 있다. 이런 사업이 본격화된 것은 농촌진흥청 공모사업인 농촌건강장수마을 육성사업에 선정되면서부터이다. 당시 건강관리, 사회활동, 환경정비, 소득활동 등을 주제로 하여 평생학습 교육 여건을 확충하는 한편으로 체험형 휴양마을을 지향했다.
이에 경산시농업기술센터는 사료 수집, 평생학습, 건강 프로그램, 마을 자원 활용 등 건강장수마을사업의 기초를 세웠다. 이듬해인 2017년에는 농촌진흥청 주관 ‘전국 어르신마을가꾸기 경진대회’에 참가하면서 대조영 후손들이 살고 있는 영순 태씨 동성마을의 역사문화 콘텐츠를 발굴하고 이를 활용하는 사업을 전개하였다.
그 결과 그해 9월에 발해마을 대형 마을 표지석, 신도비, 발해고황 대조영장군상 제막식을 진행하고 마을 벽화, 기마상 조형물, 안내석, 발해 상징 로고 깃발과 태극기, 마을 스토리 지도 등의 사업을 완료하였다. 또, ‘전국 어르신마을가꾸기 경진대회’에서 우수상을 수상함으로써 경산을 대표하는 농촌관광마을을 조성할 수 있었다. 이처럼 발해마을의 상징물 조성과 더불어 향사의 성격을 황제에 대한 제의에 걸맞게 하려는 노력도 병행하고 있다.
최근 향사는 송백리에 거주하는 후손이 회장을 맡은 ‘발해왕조제례보존회’가 주관하고 있다. 발해왕조제례보존회에서는 발해를 건국한 대조영의 표준영정을 제작하여 상현사에 안치한 것을 계기로 상현사를 ‘고황전(高皇殿)’으로 변경하고, 대조영의 황릉을 조성하는 사업을 구상하고 있다. 이미 2013년에 중국 길림성에 소재한 발해왕궁 터에서 담아와 보관 중인 흙을 대조영 황제의 능을 조성할 때 안치할 예정이다.
당시 현지에서 확인한 발해왕궁 터에서 출토된 귀면와를 재현하여 상현사의 기와로 얹었다. 중국 흑룡강성 영안현 상경용천부 절터에서 출토된 석등을 재현하는 등 발해마을의 경관 조성에 지속적인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아울러 발해왕조제례보존회에서는 고황전 뒤편의 대숲에 산책길을 조성하는 등 발해마을을 역사교육을 겸한 관광지로 가꾸어 가는 ‘발해마을종합계발계획’을 지속적으로 추진하고 있다. 이를 통해 발해왕조제례보존회에서는 발해마을이 발해가 우리의 영토라는 역사적 의식을 고취하는 현장이 되길 희망하고 있다.
[발해마을의 문화유산]
남쪽의 신방산을 배경으로 하는 발해마을은 옛 발해의 영토를 향한 염원을 반영하듯 마을이 북향으로 배치되어 있다. 발해마을의 유·무형의 문화유산으로는 상현사와 추모재(追慕齋), 송백리 태순평 가옥, 영등제 등이 있다.
서암 태두남을 기리기 위해 후손들이 건립한 추모재는 정면 4칸, 측면 1칸 반 규모의 팔작기와집의 형태를 이루고 있다. 평면은 대청을 중심으로 좌우에 온돌방을 둔 중당협실형(中堂挾室形)이며, 전면에는 반 칸 규모의 툇간을 두었다. 다섯 개의 도리로 짠 지붕 틀로 지은 집의 구조를 취하고 있다.
추모재 뒤에는 대조영의 표준영정과 19위의 위패를 안치한 상현사가 있다. 송백2리에 소재한 태순평 가옥은 1900년대 초반의 건물로 돌담을 쌓은 골목 안에 서향한 안채가 있다. 안채 전면의 마당 좌우측에는 안방과 부엌을 두었으며 우측에는 웃방을 연접시켰다. 자연석으로 쌓은 기단 위에 막돌 주초를 놓고 기둥을 세웠는데, 기둥은 모두 각주를 사용하였다. 지붕은 원래 초가였으나 지금은 곱슬레이트로 개량되었다. 세 개의 도리로 짠 지붕틀을 지은 소박한 구조를 이루고 있다. 아래채는 정면 4칸 규모의 슬레이트 건물인데, 좌로부터 초당방, 헛간, 헛간, 고방으로 연결되어 있다.
동제가 없는 송백리에서는 매년 음력 2월에 영등고사를 지내고 있다. 송백리에서는 영등고사를 ‘영등할마씨’라고 한다. 영등할마씨는 바람을 관장하는 신으로 풍년과 가내 평안을 기원한다. 2월 초하룻날 영등할마씨가 내려와 2월 열흘, 스무 날, 그믐에 다시 하늘로 올라간다.
이날 마을 사람들은 찰밥과 음식을 차려서 영등할마씨를 위한다. 특히 마을에서는 ‘바람떡’이라 하여 송편 모양의 떡을 만들고, 찰밥을 양푼에 푸거나 솥 째 정지 부뚜막에 놓고 식구 수대로 숟가락을 꽂는다. 영등할마씨는 욕심이 많아서 어떤 음식이든지 그릇째 갖다 놓아야 정성을 다한 것이라고 여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