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810042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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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永川神社-大邱駐屯日本軍彈藥庫爆破計劃事件 |
분야 | 역사/근현대 |
유형 |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
지역 | 경상북도 경산시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집필자 | 김영범 |
[정의]
1940년대 경상북도 경산 출신 박만선이 주도한 항일의거 사건.
[개설]
영천신사 및 대구주둔 일본군 탄약고 폭파계획 사건은 1943년 경산군 남산면(南山面) 출신의 서울 중동학교 학생 박만선(朴晩善)이 대구의 일본군 탄약고 폭파계획을 세웠다가 체포된 사건이다. 이에 앞서 박만선 등은 영천의 일본 신사(神社)를 불질러 없애려다 실패한 적이 있었다.
[역사적 배경]
1941년 태평양전쟁을 도발한 일제는 인력과 물자의 총동원을 지시하고 민족말살정책까지 강행하는 등 폭압통치로 한국인의 삶을 더욱 피폐하게 만들었다. 그런 상황에서 1942년 이후 경상북도 지역에서는 게릴라성 항일사건들이 연이어 발생했다. 영천신사(永川神社) 소훼(燒燬) 기도와 대구주둔 일본군 탄약고 폭파 계획도 그 중 하나였다.
[경과]
1942년 서울에서 중동학교(中東學校)를 다니며, 은밀히 일본군의 ‘학도지원병’ 모집에 반대하던 박만선은 9월경에 만주로 건너가 지린성[吉林省] 신징[新京][현재의 창춘[長春]]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 요원인 박동만(朴東萬)과 접촉하여 특수 임무를 부여받고 귀향하였다. 이어 박만선은 1943년 5월에 동갑의 대구 청년 박기수(朴基秀)와 접선했다.
두 사람은 박만선이 한 동안 살았던 영천으로 가서, 영천의 동갑 청년 이영환(李榮還)·김영길(金永吉)·이상진(李相鎭) 3인을 포섭하였다. 그리고 이들은 영천향교(永川鄕校) 옆 사망대(四望臺) 중턱에 위치한 일본 신사를 불태우기로 결의하였다. 드디어 1943년 4월 어느 날 심야에 청년들은 신사로 가서 벽판지를 헐고 안쪽에 종이 조각들을 흩어놓은 뒤 촛불을 켜 불이 번지기를 기다렸다. 그런데 하필 그때 일경이 순찰을 돌다 불을 발견하고 급히 진화하여 신사 소훼 기도는 실패로 돌아가고 말았다.
이어 박만선 등은 대구 외곽에 주둔 중인 일본군 24부대의 탄약고를 폭파하려 했다. 그리고 계획을 추진해가던 중 헌병보 박천만(朴千萬)이 동지를 가장하고 접근해 왔다. 결국 박천만의 밀고로 1944년 8월 23일부터 12월 4일까지 박만선과 박만선의 동지들이 헌병대에 연이어 붙잡혀갔다.
[결과]
1945년 5월 18일 대구지방법원에서 치안유지법 위반, 조선임시보안령 위반, 불경, 방화예비 등의 죄목으로 박만선 7년, 이영환 5년, 박기수·김영길이 각 4년의 징역형을 선고 받았다.
[의의와 평가]
일제 강점기 말기 중국 충칭[重慶]의 대한민국 임시정부 요원 및 특파원을 통해 경산 지역 청년 지사가 벌인 항일 의거 운동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