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 최씨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8100618
한자 慶州 崔氏
영어공식명칭 Gyeongju Choi Clan
분야 성씨·인물/성씨·세거지
유형 성씨/성씨
지역 경상북도 경산시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임기원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본관 경주 - 경상북도 경주시
성씨 시조 최치원

[정의]

최치원을 시조로 하는 경상북도 경산시의 세거 성씨.

[개설]

경주 최씨는 신라 시대의 학자이자 관료인 최치원(崔致遠)[857~?]을 시조로 하는 성씨이다. 경산 지역에 세거하는 경주 최씨의 입향조와 입향 경위는 명확하게 알려지지 않았다.

[연원]

경주 최씨의 본관인 경주는 경상북도 남동부에 자리한 지역으로, 고대 국가 신라의 수도였다. 신라는 기원전 57년에 경주 지역에서 6촌이 연합하여 탄생하였으며, 수도인 경주는 ‘금성(金城)’으로 불렸다. ‘경주’라는 명칭은 935년(태조 18)에 신라 마지막 왕 경순왕이 고려에 항복하면서 처음 생겨났다. 이후 987년(성종 6)에 동경(東京)으로 개칭하였고, 여러 차례 변천을 거듭하다 1308년(충렬왕 34) 계림부(鷄林府)로 고쳤다. 조선 건국 후 1413년(태종 13)에 계림부를 경주부(慶州府)로 개칭하면서 ‘경주’라는 이름을 다시 사용하기 시작하였다. 1895년(고종 32) 경주군으로 개편되었고, 1955년에 경주시로 승격되었다.

경주 최씨는 신라 초기 6촌 중 하나인 돌산고허촌(突山高墟村)[뒤의 사량부] 촌장 소벌도리(蘇伐都利)를 원조(元祖)로 하고, 소벌도리의 24세손인 최치원을 시조로 한다. 최치원은 857년(문성왕 19)에 사량부에서 태어났으며, 어린 시절부터 총명함을 인정받았다. 18세 때 당나라로 건너가 빈공과에 급제하였고, 876년 선주(宣州) 율수현위(凓水縣尉)가 되었다. 879년 당나라에서 황소(黃巢)가 반란을 일으키자 관군의 종사관(從事官)으로 참전하였으며, 「격황소서(擊黃巢書)」 등을 지어 문명을 떨쳤다. 공적을 인정받아 879년 승무랑(承務郞) 전중시어사내공봉(殿中侍御史內供奉)에 올랐으며, 882년에는 자금어대(紫金魚袋)를 하사받았다.

[입향 경위]

경주 최씨의 경산 지역 입향 경위는 기록이 없어 명확히 알 수 없다.

[현황]

경주 최씨는 2015년 인구주택총조사 자료에 의하면 경산시에 7,390명이 거주하고 있다. 경산 지역 내에 두드러진 집성촌은 형성되어 있지 않다.

[관련 유적]

경주 최씨 관련 유적으로 경산시에 남아 있는 것은 팔용재(八龍齋)와 경송재(景松齋) 등이 있다. 팔용재경상북도 경산시 하양읍 한사리에 있으며, 조선 후기에 최한중(崔翰重)이 서당으로 건립한 건물이다. 현재는 경주 최씨 재실로 사용하고 있다. 정면 4칸, 측면 1칸 규모의 맞배지붕 기와 건물로, 삼량가 구조이다. 평면은 좌측에 온돌방 2칸을 두고, 우측에 우물마루를 깐 대청 2칸을 연접시켰다.

경송재는 경산시 남천면 산전리에 있으며, 송재(松齋) 최문주(崔門柱)[1589~1654]의 덕행을 기리기 위해 1932년에 건립한 재실이다. 최문주의 자는 희명(希明)이고, 본관은 경주이다. 관직에는 뜻을 두지 않고 70년간 도의(道義)를 고수하며 학문에만 전념하였다고 한다. 1607년(선조 40) 19세의 나이에 정구, 장현광 등 도 내 선비와 함께 용화산 아래 낙동강에서 뱃놀이를 하며 기록한 『용화산하동범록(龍華山下同泛錄)』에 이름을 남겼다. 어진 이들과 친하게 지내며 일찍이 도를 깨달은 것으로 전해진다. 후손들이 경산으로 이거하여 살면서 최문주의 행적을 기리기 위해 최환목(崔煥穆), 최성규(崔聖圭), 최종진(崔鍾震)을 중심으로 문중에서 논의하여 경송재를 건립하였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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