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340026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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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歷史 |
영어의미역 | History |
분야 | 역사/전통 시대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개관) |
지역 | 경상남도 하동군 |
집필자 | 박용국 |
[정의]
선사 시대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경상남도 하동군의 역사.
[개설]
하동의 역사는 문자로 기록되기 이전의 선사 시대와 그 이후로 나누어 볼 수 있다. 현재까지 하동 지역에서 확인된 선사 시대의 유적은 하동군의 동북쪽 덕천강 유역과 서남쪽 섬진강 유역 일대에 집중 분포하고 있다. 하동의 역사는 수습된 유물을 통해서 보면 구석기 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초기 철기 시대에 이르러 작은 정치체가 형성되어 악양면의 낙노국(樂奴國)과 고전면의 다사국(多沙國)으로 발전하였을 것으로 본다. 이들 소국(小國)은 백제에 병합되어 군현이 되었다가 신라 진흥왕[재위 540~576]이 하동을 정복하였으며, 이후 백제 의자왕[재위 641~660]이 일시 차지하기도 하였다.
757년(경덕왕 16) 신라의 한화 정책(漢化政策)에 의해서 한다사군(韓多沙郡)도 하동군으로 고쳐 강주(康州)에 영속(領屬)되었다. 이후 읍격(邑格)에 차이가 있었지만 하동이라는 지명으로 호칭되었다. 나말 여초에 하동 지역은 중소 호족들이 지배했을 것이다. 고려 시대에는 하동의 토성(土姓)인 정씨들이 크게 활약을 했을 것으로 보인다.
조선 태종 때 잠시 남해현과 합쳐지기도 했으나 1704년(숙종 30) 도호부로 승격하여 그 위상이 높아졌다. 도호부로 승격하는 과정에서 행정 구역이 크게 확대되었을 뿐만 아니라 1906년에도 진주의 옥종·청암 등이 하동군에 편입되어 행정 구역과 인구가 크게 불어났다. 하동군은 일제 강점기에 몇 번의 행정 구역 개편을 거쳐 오늘에 이르고 있다.
[선사 시대]
하동 지역의 구석기 시대 유적이 확인되지 않았으나 하동군 옥종면 정수리에서 돌도끼를 비롯한 몇 점의 유물이 수습된 사례에서 보면 하동의 역사는 구석기 시대부터 시작되었다고 봐도 될 것이다. 하동 지역의 신석기 시대 유적지로는 하동 목도 패총·금성면 궁항리 패총 등이 있다.
하동 지역에는 청동기 시대에 이르러 무문 토기인들이 섬진강·덕천강 유역만이 아니라 횡천강·악양천·통정천 등 여러 지천(支川)에 형성된 충적 대지에 의지하여 취락을 형성하고 점차 작은 정치체를 형성하여 갔을 것이다. 하동의 전 지역에서 발견되는 많은 고인돌들은 청동기 문화와 농경 문화가 하동 지역에 뿌리를 내리면서 계급 분화가 촉진되었을 것임을 보여주는 뚜렷한 증거이다.
[고대]
고대 사회는 원시 공동체 사회가 해체되면서 계급 분화가 일어나고 지배 계급에 의한 작은 정치체가 형성되는 시기부터 나말여초까지라고 볼 수 있다. 하동 지역의 고대 사회는 청동기 문화와 농경 문화를 바탕으로 한 작은 정치체가 형성되기 시작했던 것에서 비롯되어 장차 악양의 낙노국과 고전의 다사국으로 발전하였을 것이다.
하동 지역의 정치체들은 가야 문화권에 속하였으며, 한때 고령에 있던 대가야의 대외 창구 역할을 했던 것으로 보기도 한다. 이 시기 하동 지역을 지배하던 지배층의 무덤으로 생각되는 고분들이 하동읍·악양면·고전면 등 여러 곳에서 확인되고 있다. 최근에 하동군 하동읍 흥룡리에서 발견된 대단위 가야 고분군은 수혈식 석곽묘로서 5~6세기에 축조된 것인데, 소가야·대가야·백제·신라 등의 외래 양식 토기와 재지에서 만든 토기가 같은 비율로 출토되어 하동 지역의 정치체의 성격을 보여주고 있다.
하동 지역의 소국들은 백제에 편입되어 소다사(小多沙)·한다사(韓多沙)와 같이 군(郡)으로 재편되었을 것이다. 하동군은 삼국 통일 후 685년(신문왕 5) 지방 통치 체제의 재편 과정에서 한다사군이 되고 청주(菁州)에 속하게 되었다. 757년(경덕왕 16) 경덕왕이 한다사군을 하동군으로 개명하여 강주에 영속하게 하였다.
[고려 시대]
먼저 행정 구역의 변천을 살펴보면, 하동군은 통일 신라 시대 이후 고려 시대에도 그대로 이어져 1018년(현종 9)에 전국의 지방 행정 중심지를 4도호부 8목의 체제로 개편하는 과정에서 진주목의 속군(屬郡)이 되었다. 한편 통일 신라 시대 하동군의 영현이었던 악양현과 하읍현은 진주목의 속현이 되었으며, 화개 지방도 특수 행정 구역인 부곡으로서 진주목에 속하였다. 1172년(명종 2)에 이르러 비로소 하동군에 감무(監務)를 두면서 하동군은 진주목의 속군 지위에서 벗어나 독자적인 행정 구역화하였다.
고려 시대 하동 지역의 사회상을 보여주는 자료는 단편적인 기록 외에 거의 남아 전하지 않는다. 하동 지역의 재지 세력은 통일 신라의 군현 체제에서 촌주 세력으로 존재하였으며, 이들이 나말여초에 중소 호족으로 성장하였을 것으로 생각된다. 하동 지역의 중소 호족 세력은 태조 왕건(王建)이 후삼국을 통일한 후 지방을 재편할 때 토성(土姓)을 분정 받아서 재지 세력화 하였을 것이다. 대표적인 하동의 재지 세력이 하동 정씨일 것으로 보인다.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하동현의 인물조에 정지연(鄭芝衍)의 아버지 정국룡(鄭國龍)이 현의 아전[향리]으로 기록되었던 것에서 잘 알 수 있다. 이처럼 하동군의 행정은 주읍인 진주목의 관할 하에 재지 세력인 향리가 담당하였으며, 감무를 두면서 향리의 위상은 더욱 커졌을 것이다. 12세기 이후 하동 정씨가 번성했던 것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고려 시대 대표적인 하동의 인물로는 정지연 이외에 『고려사(高麗史)』 열전에 보이는 정세유(鄭世裕)와 정지상(鄭之祥), 『경상도지리지(慶尙道地理志)』 하동현의 상경종사조(上京從仕條)에는 고려 원종 때의 인물로 정숙첨(鄭淑瞻), 공민왕(恭愍王) 때의 인물로 정방길(鄭方吉), 『신증동국여지승람』 하동현의 인물조에 정안(鄭晏)·정지상·정혼(鄭渾)이 보인다. 요컨대 하동은 고려 초기부터 4개의 성씨 집단이 유력한 토착 세력으로 존재하였으며, 특히 정씨가 그 세력을 대표하였음을 토성 명현을 통해서 잘 알 수 있다.
[조선 시대]
조선 시대 하동의 건치 연혁을 살펴보면, 1414년(태종 14) 하동현에 남해현을 합하여 하남현이라 하고 하남현령(河南縣令)을 두었다가, 1415년 다시 나누어서 하동현감(河東縣監)을 두었다. 조선 전기 이전의 치소는 오늘날 하동군 고전면 고현성 일대에 해당한다. 1661년(현종 2) 읍의 치소를 횡포(橫浦)로 옮겼다가 1679년(숙종 5)에 다시 구읍으로 환원하였다.
1703년(숙종 29) 읍치를 진답면(陳沓面) 두곡리(豆谷里)로 옮기고, 다음해 도호부(都護府)로 승격시켰다. 1730년(영조 6) 읍의 터전이 좁고 평탄하지 못하다고 하여 5리 정도 떨어진 나동으로 치소를 옮기고, 또한 1745년(영조 21) 부사 전천상(田天祥)이 현재의 자리인 항촌으로 옮겼다.
한편 조선 시대 하동의 호구와 전답의 변화를 살펴보자. 먼저 『세종실록지리지(世宗實錄地理志)』에서 하동은 땅이 기름지고, 기후가 따뜻하다고 했으며, 『신증동국여지승람』 하동현 편을 보면 습속이 검소하고, 솔직함을 숭상한다고 하였다. 『경상도지리지』와 『세종실록지리지』를 보면 하동의 토성(土姓)은 정씨(鄭氏)·곽씨(郭氏)·이씨(李氏)·하씨(河氏)라고 나온다. 당시 진주목 경내였던 악양현의 토성은 도씨(陶氏)·임씨(任氏)·손씨(孫氏)·오씨(吳氏)·박씨(朴氏)였다.
1425년(세종 7)에 편찬된 『경상도지리지』 하동현의 호구편에 호수(戶數)가 346호, 인구가 2,160명으로 남자가 1,108명, 여자가 1,052명이었다. 당시 진주의 영현이었던 악양현은 호수가 61호, 인구가 377명으로 남자가 181명, 여자가 196명이었다.
1432년(세종 14)에 편찬된 『신찬팔도지리지(新撰八道地理志)』를 전재(全載)한 것으로 보이는 『세종실록지리지』 하동현 편을 보면 호수는 346호, 인구가 1,108명이며, 악양현은 호수가 61호, 인구가 181명이었다. 이때 군정(軍丁)은 시위군(侍衛軍)이 15명, 진군(鎭軍)이 11명, 선군(船軍)이 158명이었다. 간전(墾田)이 1,272결(結)이었다.
1757년(영조 33)부터 1765년 사이에 편찬된 전국 읍지를 모은 『여지도서(輿地圖書)』 하동부읍지를 보면 1711년 호수가 3,832호, 인구가 1만 7289명으로 남자가 9,068명, 여자가 8,221명이었다. 한전(旱田)이 원장부(元帳付)에 1,713결 5부(負) 1속(束)이고, 각 종의 면세지와 진전(陳田) 등이 787결 93부 3속인데, 당시 기전(起田)이 925결 11부 8속이었다. 수전(水田)은 원장부에 2,341결 41부 9속이었다.
『대동지지(大東地志)』는 1864년(고종 1)경 고산자(古山子) 김정호(金正浩)가 편찬한 전국 지리지인데, 여기에 따르면 민호(民戶)는 3,680호에 인구가 1만 5990명이었던 것으로 나온다. 당시 하동의 전(田)은 1,713결, 답(畓)은 2,032결이었다. 이상에서 보듯이 하동의 호구의 수는 조선 초기에 비해서 18세기 이후 크게 차이가 나는 것은 자연 증가와 더불어 1702년(숙종 28) 진주목의 악양·화개 등 4개리를 임금의 윤허를 받아 하동으로 분속시켰던 것도 한 이유이다.
[근대]
근대 시기 행정 구역의 변천을 살펴보면, 1895년(고종 32) 5월 26일 칙령 제98호, ‘지방 제도 개정건’으로 전국을 23부(府)의 행정 구역으로 나눌 때 하동부는 23부 가운데 하나인 진주부 관할의 하동군으로 바뀌었다. 1896년 8월 4일 칙령 제36호, ‘지방 제도 관제 개정건’으로 진주부는 경상남도로 바뀌었으며, 하동군은 경상남도 하동군으로 되었다.
1906년 오늘날 청암면(靑岩面)과 옥종면 및 북천면에 해당하는 진주군의 북평면(北坪面)·종화면(宗化面)·가서면(加西面)·운곡면(雲谷面)·청암면·대야면(大也面)·정수면(正水面) 등 7개 면이 하동군에 분속되었다. 이로써 하동군의 행정 구역과 인구가 크게 늘어났다. 실제 1907년 하동군의 호수는 원래 8,844호에 새로 편입된 7개 면의 호수 3,284호가 더해져 하동 호수는 1만 2128호가 되었으며, 인구도 5만 5511명에 이르렀다.
근대 시기 하동의 대표적인 사건은 고성산성 전투이다. 진주 지역 동학 농민군은 일본 제국주의의 한반도 침략과 정치적 간섭을 노골화하는 1894년 9월에 반외세를 기치로 한 농민군 1,000명이 너우니[광탄]에서 봉기하여 일본군을 상대로 전투를 벌이게 된다.
1894년 11월 11일 진주를 중심으로 한 서부 경상남도 지역의 동학 농민군 5,000여 명은 재래식 무기로 무장한 채 고성산성에서 진주 주둔의 신식 무기로 무장한 일본군 1개 중대와 치열하게 전투를 벌여 패퇴했다. 당시 일본군의 보고서에 따르면 동학 농민군 전사자가 186명, 부상자도 수십 명이었다고 한다. 동학 농민군이 고성산성에서 일본군을 상대로 치열한 전투 끝에 패퇴했지만 새로운 사회로의 갈망을 담은 그들의 변혁의 기치는 19세기 초 이래 이 지역의 사회 변혁 운동을 이은 중요한 역사적 의의를 지닌다.
[일제 강점기]
일제 강점기 행정 구역의 변천을 살펴보면, 1914년 행정 구역 개편에 따라 진주군에서 편입된 지역을 북천·가종·옥동·청암의 4개 면으로 통합했으며, 곤양군의 금양면과 서면을 편입하면서 서면을 남면으로 개칭하였다. 이리하여 하동은 14개의 면[남면·고전면·양보면·북천면·옥동면·가종면·덕양면·적량면·내횡보면·악양면·동면·화개면·청암면·금양면]으로 되었다.
1915년 전라남도 광양군 다압면 섬진리 일부를 편입하고, 1916년 내횡보면을 횡천면으로 개칭하였다. 1918년 동면을 진교면으로 개칭하였다. 1928년 4월 1일 옥동면과 가종면을 합하여 옥종면으로 되고, 1933년 1월 1일 금양면의 고룡리·양포리·안심리를 진교면에 편입하였다. 남면은 금양면의 노량리·대치리·중평리·술상리를 편입함으로써 금양면이 폐지되었던 것이다. 하동군은 1933년 12개 면이 되고, 1938년 10월 1일 하동면이 하동읍으로 승격하여 1읍 11면이 되었다.
1919년 3·1 운동 때 4월 3일부터 20일까지 하동장을 비롯한 고전면·옥종면·화개면 등에서 수많은 군민이 자주 독립을 주창하였으며, 많은 인사가 죽임을 당하거나 투옥되었다.
[현대]
해방 이후 하동의 행정 구역 변천을 살펴보면, 1955년 7월 1일 하동군 옥종면 원계리(元溪里)를 진양군 수곡면에 이속시켰다. 1966년 화개면에 신흥출장소, 1969년 청암면에 위태출장소가 설치되었다. 1983년에는 하동군 옥종면 중태리를 산청군 시천면에 이속시켰다. 1986년에는 금남면에 갈사출장소가 설치되었다.
1989년 1월 1일 금남면 술상리가 진교면에, 옥종면의 법대리 일부가 병천리에 편입되었으며, 4월 1일 금남면 갈사출장소가 금성면으로 승격하여 1읍[하동읍] 12면[화개면·악양면·적량면·횡천면·고전면·금남면·금성면·진교면·양보면·북천면·청암면·옥종면]이 된다. 1992년 군청 소재지를 하동군 하동읍 읍내리의 현 위치로 이전하였다. 1996년 3월에는 화개면 신흥출장소, 1998년 9월에는 청암면 위태출장소가 폐지되었으며, 2002년 12월 청암면의 위태리·궁항리·회신리를 옥종면으로 편입하여 1읍 12면으로 오늘에 이르고 있다.
하동 지역은 해방 이후 10여 일 동안 일제의 경찰에 의해서 장악되고 있었다. 그러나 8월 27일 여운형(呂運亨) 주도의 건국준비위원회 하동군지부가 결성되어 위원장에 정진기가 선출되고, 건국준비위원회의 치안대가 하동경찰서를 인수하여 치안을 담당하면서 실제적인 해방을 맞이하였던 것이다.
건국준비위원회는 미군의 상륙에 대비해서 서둘러 인민공화국을 선포하면서 하동에도 인민위원회가 결성되었다. 이후 미국의 한반도 점령 정책과 미국과 소련의 이해관계에 의해서 좌우간의 갈등이 서서히 드러나고, 신탁 통치를 둘러싸고 좌우의 대립이 격화되면서 하동 지역의 분열도 극심하였다. 결국 건국준비위원회 주도의 민족 자주의 민주 독립 국가 건설의 노력이 수포로 돌아가고 말았다.
하동 지역은 해방 이후 처음 맞이하는 3·1절 기념식조차 좌우익으로 나누어 개최되었으며, 그 대립이 심화되는 가운데 이승만(李承晩)이 하동을 찾아 반탁을 강조하였다. 1947년 5월 30일 양보면·고전면·북천면·옥종면·금남면의 좌익 청년동맹원 2,000여 명과 군정 경찰·한청이 하동읍 장악을 두고 적량면 경계에서 맞서기도 하였다. 1948년 남한 단독 정부 수립을 두고 제주 4·3 항쟁이 발생했으며, 하동 지역에도 1948년 10월 여수·순천 사건으로 화개면·악양면·청암면 등 3개 면의 일부가 소개되는 등 피해가 적지 않았다. 하동 지역에는 1948년 총선거에서 강달수가 제헌 의원으로 선출되었으며, 8월 15일 정부 수립을 축하하는 대회가 개최되었다.
6·25 전쟁 때 지리산으로 도피한 빨치산들이 1952년 하동읍을 습격하는 등 많은 피해를 입었다. 1968년 경전선이 개통되고, 1973년 남해고속도로가 군의 남부를 동서로 관통함으로써 지역 발전에 커다란 계기를 마련하였다. 1980년대 들어 하동과 경계로 한 광양에 제철소가 들어서고, 화개면과 악양면을 중심으로 한 지리산권의 자연 생태 자원과 인문 자원을 활용한 관광 산업이 활성화되면서 지역 경제가 크게 발전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