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340112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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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愛國啓蒙運動 |
영어의미역 | patriotic enlightening movement |
분야 | 역사/근현대 |
유형 |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
지역 | 경상남도 하동군 |
시대 | 근대/개항기 |
집필자 | 추경화 |
[정의]
1905년에서 1910년 사이 조선의 국권 회복을 위해 경상남도 하동군을 포함한 조선 전역에서 일어난 실력 양성 운동.
[개설]
1904년 한일 의정서와 한일 협약, 1905년의 을사조약으로 조선은 국권을 거의 상실하게 되었다. 이에 한편에서는 의병 투쟁이, 또 한편에서는 애국 계몽 운동이 일어나 국권 회복을 위해 노력하였다. 애국 계몽 운동은 1904년 보안회의 황무지 개척 반대 운동으로부터 시작되었으나, 일반적으로 1905~1910년에 개화 자강파의 국권 회복을 위한 실력 양성 운동을 총칭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애국 계몽 운동은 국권 회복과 근대 국가 건설을 위해 애국 애족의 기치 아래 결집하여 실력을 양성하도록 국민을 인도하는 운동이었다. 이것은 신교육 구국 운동이며, 언론 계몽 운동, 국채 보상 운동, 신문학 운동, 국학 운동, 민족 종교 운동 및 해외 독립 기지 건설 등을 포함한다. 애국 계몽 운동은 점진적 실력 양성을 중시했으나 무장 투쟁 노선인 의병 활동과 보완적 성격을 가졌고, 해외에 무관 학교를 설립해 독립군을 양성하기도 하였다.
[역사적 배경]
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전 민족적으로 반일 감정이 크게 일어나고 의병들의 활동이 다시 일어나 투쟁의 강도가 극에 달하게 되었다. 하동은 의병들의 투쟁 장소로 유리한 지리적 환경을 지니고 있어 의병 운동이 활발히 일어났다. 이와 함께 신교육 운동 및 계몽 단체 활동, 국채 보상 운동 등 애국 계몽 운동도 일어났다.
[경과]
대한자강회가 고종의 양위와 을사 보호 조약을 반대하다 강제로 해산당한 후 남궁억(南宮檍)이 1907년 11월 대한협회를 창설하였다. 대한협회는 교육 보급, 산업 계발, 행정 제도 개선, 근면 저축의 실행 등을 내세우고 각 시군에 지회를 조직하였다. 진주와 하동에도 대한협회 지회가 조직되었는데, 진주지회 회장은 박재구이고, 하동지회 회장은 누구인지 알 수 없다. 『경남일보』[1909. 11. 21.] 등에 보면, 하동지회 서기 이원열(李元烈)과 김기완[1883-1961]의 이름을 확인할 수 있다.
이원열은 뒤에 임시 정부 조사원으로 활동하다 일본 경찰에 발각, 체포되어 약 1년간 옥고를 치렀다. 김기완은 뒤에 청년 운동, 신간회 활동, 노동 운동을 전개하고 조선노동총동맹 중앙 집행 위원, 조선사회단체협의회 활동을 하였으며, 전라남도에서 농민연합회 간부인 조동혁·김승탁 등과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옥고를 치르는 등 독립운동을 계속하였다.
[결과]
국채 보상 운동은 1907년 대구에서 시작되어 전국으로 확대되었다. 하동 지역에서도 1907년 4월부터 12월에 수천 명의 백성들이 동참하여 1전부터 수십 원까지 십시일반으로 협력했음을 당시 신문을 통해 알 수 있다. 최근 (사)국채보상운동기념사업회[회장 김영호]가 찾아낸 『국채 보상 소손금책』은 하동 지역 국채 보상 출연자 명단과 성금액이 기록된 책이다. 이를 통해서도 하동 지역의 국채 보상 운동이 매우 활발하게 이루어졌음을 확인할 수 있다.
[의의와 평가]
애국 계몽 운동은 문화 운동이 되고 항일 투쟁이 되어 이후 계속적인 항일 운동을 이어나가게 한 중요한 촉매제가 되었다. 뒤이은 3·1 운동과 청년 운동, 신간회 활동의 직접적인 원류가 되었을 뿐 아니라 나아가서는 노동자·농민 운동, 무장 투쟁에 까지 영향을 미친 것으로 평가할 수 있다. 애국 계몽 운동은 새로운 민족 문화를 만들어 내고 암울한 일제 강점기를 이끄는 역할을 했음이 분명하다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