콘텐츠목차

열녀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3401775
한자 烈女
영어의미역 Virtuous Woman
분야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종교/유교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지역 경상남도 하동군
시대 조선/조선
집필자 전병철

[정의]

경상남도 하동 지역에서 목숨으로 정조를 지켰거나 남편을 위해 지극한 정성을 다한 부녀자.

[개설]

홍근호가 지은 『열부정려기(烈婦旌閭記)』에 “부인의 행실은 죽음으로써 열(烈)을 나타내니, 타고난 천성(天性)을 지키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한자로 ‘열(烈)’의 뜻은 매우 다양하다. 따라서 열녀란 ‘세차고 사납고 굳세며 정열을 지키기 위하여 욕망을 불태워 없애고, 빛나고 밝고 아름다운 큰일을 한 여자’로 해석해볼 수도 있다. 유교에서 특히 중요시한 것은 효(孝)와 열로, 효는 자식으로서 어버이를 잘 섬기는 인간의 가장 기본적인 도리이며, 열은 부부 사이에 있어서의 여자의 도리를 말하는 것이다.

[남편의 죽음을 따라 자진(自盡)한 유형]

하동군 고전면에 살던 김경좌(金慶佐)의 처 광산 김씨(光山金氏)는 18세에 김경좌에게 시집을 갔는데, 시부모를 정성껏 효심으로 모시고 남편에게는 유순했으며 동서 간에 우애롭게 지냈다. 1871년 봄에 남편이 병에 걸리자 하인을 시키지 않고 몸소 약을 달이고 죽을 쑤어 간병하고, 낫기를 기원하며 한 달 동안 눈도 붙이지 않고 방도를 구하러 다녔다.

남편이 위독해져 기절하자 손가락에 피를 내어 입으로 흘려 넣어 며칠 목숨을 연명하게 하였다. 그러다 남편이 죽자 슬픔에 못 이겨 피를 토하면서 형색이 파리해질 정도로 곡하고 기절하는 등 사람의 형상이 아니었다. 집안사람들이 억지로 먹게 하여 겨우 장례일까지 버티었다. 장례일 아침에 시어머니께 절하고는 시동생과 세 아들에게 “어머니 봉양을 부탁한다. 나는 지아비의 뜻을 따르기로 결심했다.” 하고는 먹지 않다가 며칠 뒤에 50세의 나이로 운명하였다.

하동군 횡천면에 살던 박이한(朴而翰)의 처 진양 하씨(晉陽河氏)는 시집간 지 한 달 만에 남편이 병으로 죽자, 시신을 입관한 뒤에 목을 매어 자결하였다. 유명한(劉明漢)의 처 웅천 주씨(熊川朱氏)는 남편이 죽자 3년 상을 치렀으며, 상을 치르는 동안 머리도 빗지 않았다. 그리고 3년 상을 마치는 마지막 날 자결하였다.

하동군 양보면에 살던 정환탁(鄭煥倬)의 처 밀양 손씨(密陽孫氏)는 남편이 병들게 되자 시부모를 극진하게 봉양하며 남편의 병에 대해서는 항상 시부모에게 좋아지고 있다고 고해 부모의 걱정을 덜었다. 그리고 몸가짐을 정갈히 하고 항상 편안한 모습을 보였으며, 남편의 병이 위중해졌을 때도 남편과 나란히 앉아 옆에서 간호하였다.

어느 날 남편은 자신이 병에서 회복되기 힘들다는 것을 알고 아내에게 자신을 따라 죽을 생각은 하지 말라고 당부하였으나, 손씨는 정색하며 어찌 그런 말을 하느냐고 말했다. 그 뒤로 손씨는 매일 밤 정화수를 떠놓고 북극성에 자신이 남편의 병을 대신하게 해달라고 기도하였다. 그러다가 남편이 혼절하여 사지(四肢)가 굳어지자 손씨도 남편을 따라 죽으니, 이때 손씨의 나이가 27세였다.

[환란에서 절개를 지킨 유형]

사노(私奴)였던 이노미(李奴未)의 처 조(曺) 소사(召史)는 계사년(癸巳年)[1593]의 난리에 적을 만나자 죽음으로 절의를 지켰다. 조언세(曺彦世)의 처 하(河) 소사도 계사년의 난리에 우연히 적을 만나 위급하자 스스로 목을 찔러 자결하였다.

[수절(守節)하며 가문을 지킨 유형]

김주봉(金周鳳)의 처 연안 차씨(延安車氏)는 타고난 성품이 효성스럽고 유순하여 출가 전에도 부모의 사랑을 받았다. 출가 후 남들이 힘들어하는 일들도 무던히 견디고 방직과 농사일에 불평 없이 임하였다. 시부모를 효성스럽게 봉양하고 남편을 예로 섬겼는데, 맛있는 음식을 드리고 시절에 맞추어 편안하게 해드렸다. 연이어 시부모 상을 당하여 3년 상을 극진히 치렀는데, 일여 년 남짓 만에 남편이 죽었다.

남편 뒤를 따라 자결하려다 자신이 죽으면 조상을 모실 사람이 없고 아이들도 고아가 되어 의지할 데가 없음을 깨닫고 마음을 다잡았다. 그 뒤로 땔나무하고 경작하고 품도 살고 행상도 하여 집안을 일으켰다. 아들인 김용순(金容珣)과 김용석(金容奭)이 가문을 이어 나라의 초석이 되었다. 매년 시부모 기일에 생전에 좋아하시던 음식을 올리고 곡진히 애도하였다. 또 남편의 기일을 위해서는 평소에 땔감을 한쪽에 따로 모아두었다가 그것을 사용해 제수를 장만하며 늘 그리워하였다.

하동군 진교면에 살던 문수호(文守浩)의 처 진양 정씨(晉陽鄭氏)는 어려서 부모에게 효성스러웠으며 시집와서도 시부모 봉양과 남편 내조를 잘 하였다. 남편이 광견(狂犬)에게 물려 병이 나자 지성으로 간호하고, 병세가 심해지자 손가락에 피를 내어 남편 입에 흘려 넣어 며칠 수명을 연장시켰다. 남편이 죽자 따라 죽으려 했으나 후사가 없는데다 가세도 한빈한 것을 생각하고는 시부모님의 만류로 뜻을 접었다. 이전 보다 더 시부모님을 공경히 봉양하였으며 시부모남의 장례에도 묏자리를 가려 극진히 상을 치렀다. 밤낮으로 열심히 일하여 가계를 일으켰고, 시동생 문재호(文在浩)의 아들 문인식(文仁植)을 양자로 삼아 가문을 이었다.

박재춘(朴在春)의 처 해주 정씨(海州鄭氏)는 18세에 박재춘과 결혼하여 채 시집으로 오기도 전에 친정에서 남편의 발병 소식을 들었다. 밤새껏 말을 타고 달려와서 목욕재계하고 하늘에 빌며 온갖 방법을 동원했으나 8개월 만에 남편의 병은 더욱 악화되었다. 손가락을 깨물어 피를 흘려 넣어 겨우 하루 회생하는 듯 했으나 결국 남편은 죽었다. 슬퍼서 기절하다 못해 따라 죽으려고 몰래 독을 마셨다.

연로하신 시어머니가 발견하고는 “네 남편이 불행이도 요절하였는데 너마저 따라 죽는다면 나는 누구와 살 것이며 네 남편의 제사는 누가 모실 것이냐”라고 울면서 말하자, 알아듣고는 마음을 바꾸어 예를 갖춰 장례를 지냈다. 정성껏 공양해야 하나 손가락 상처가 근심거리이던 차에, 하루는 꿈에 죽은 남편이 나타나 “국화를 찧어 붙이면 가장 좋네”라고 하여 그대로 하였더니 깨끗이 나았다. 자기 몸을 돌보지 않고 백방으로 공양하며 효성을 다해 모셔 시어머니는 천수를 누리고 돌아가셨다. 조카를 후계로 삼고 집안의 도를 점차 일으켜 죽을 때 까지 바꾸지 않았다.

백남봉(白南鳳)의 처 안릉 이씨(安陵李氏)는 천성이 효성스러워 시어머니를 극진히 섬겼다. 23세에 남편의 병이 심해지자 자신의 손가락을 깨물어 피를 흘려 넣었으나 끝내 남편은 죽었다. 부인이 크게 울며 “박복한 몸이 살아서 무엇 하리” 하고는 곡기를 끊고 따라 죽으려 하였다. 시어머니인 월성 석씨(月城昔氏)가 며느리를 불러놓고 울면서 “네 남편이 죽고 혈속은 없다. 나와 후사(後事)가 너의 생사에 달렸으니, 너는 그것을 헤아려라”라고 깨우치자, 부인이 알아듣고는 마음을 바꾸어 예를 갖춰 장례를 지내고 시어머니를 예전처럼 섬기었다. 조카를 후계로 삼았고 부지런히 재산을 관리하여 죽을 때 까지 성실하였다.

하동군 악양면에 살던 백락훈(白樂訓)의 처 밀양 손씨는 어려서부터 부모의 명을 어기는 일이 없어 효녀라 칭찬받았다. 시집가서 남편이 중병에 걸려 여러 달이 지나도 낫지 않았다. 병의 증상을 알기 위해 똥의 맛을 보기도 하고 병상의 고통을 자기가 대신하겠다고 하늘에 빌기도 하였다. 병세가 위독해지자 자기 손가락을 깨물어 피를 입에 흘려 넣어 며칠 목숨을 연명시켰다. 남편이 죽은 뒤에는 3년 동안 문 밖을 나가지 않고 따라 죽지 못한 것을 한스러워하였다. 오직 길쌈을 낙으로 삼아 시부모를 섬기고 자식을 길러 가문을 일으켰다.

손임식(孫任植)의 처 합천 이씨(陜川李氏)는 천성이 유순하고 부덕(婦德)을 겸비하였으며, 시부모를 효성으로 봉양하고 남편을 잘 섬겼다. 남편이 병들어 위독해지자 손가락을 깨물어 피를 마시게 했으나 효험이 없이 죽자 남편을 따라 목숨을 끊으려 하였다. 하지만 늙은 시부모와 어린 두 아이, 또 배 속에 아이가 있어 죽으려는 뜻을 버리고 24년 동안 노부모를 봉양하고 아이를 키우며 남편이 살았을 때와 같이 하였다. 쑥대머리와 때 묻은 얼굴로 바느질하고 베를 짜며 농사일에 힘써 가업(家業)을 이루고 죽을 때까지 수절하였다.

양주기(梁柱基)의 처 창녕 조씨(昌寧曺氏)는 남편이 갑오년(甲午年) 농민 항쟁에 참여하였다가 하동군 옥종 북방 고성산(高城山)에 함몰 당하였다. 창녕 조씨가 그 소식을 듣고 즉시 찾아가 시체가 산처럼 쌓이고 썩은 냄새가 진동하는 속에서 남편을 찾기 시작하였다. 하지만 시체들이 변색되어 찾기가 어렵게 되자 옷의 바느질 선을 살펴서 남편의 시체를 찾았다. 찾은 남편의 시체를 30리가 넘는 하동군 청암면 장재동으로 이고 와 선산(先山) 아래 안장하였다. 이 때 나이가 서른이고 아들이 하나 있었으나 청상(靑孀)으로 수절하였다.

정인우(鄭仁佑)의 처 경주 김씨(慶州金氏)는 남편이 25세에 병을 얻어 일어나지 못하게 되자 황망하여 남편을 따라 목숨을 끊으려 하였으나, 시부모가 “네가 죽으면 우리들과 두 아이는 누가 키우느냐?”라며 말려 마음을 고쳤다. 이후 정절을 지키며 시부모를 봉양하고 두 아이를 정성으로 키우면서 ‘아직 죽지 못한 사람[未亡人]’이라고 자처하였다. 두 아이가 자라 취학하게 되었을 때 맹모지교(孟母之敎)로 훈도하여 모두 고을에서 학행으로 이름나게 되었다.

한덕동(韓德東)의 처 합천 이씨(陜川李氏)는 15세에 한씨 집안으로 출가하여 시부모에게 효성을 다하고 남편을 예로써 섬겨 일가가 화목하였으므로, 향리 사람들이 모두 열복(悅服)하여 칭송하였다. 하지만 19세에 자식도 없는데 남편이 중병에 걸려 몇 달 동안 병상에 눕게 되었다. 모든 약이 효험이 없어 이씨는 산천에 기도하며 자신이 남편의 병을 대신하게 해달라고 기도하였으나 이마저도 효험 없이 남편은 죽게 되었다. 이씨는 곧바로 죽어 남편의 뒤를 따르려 하였으나 선대에 제사를 지낼 사람이 없고 시부모를 부양할 사람도 없어 억지로 생을 연명하며 예를 갖춰 상을 치렀다. 10여 년 뒤 시아버지가 병을 얻어 위독해지자 손가락을 깨물어 피를 마시게 하니 시아버지가 소생하여 3일이나 더 살았다.

[환란을 당해 신이(神異)한 행적을 행한 유형]

하동군 진교면에 살던 김찬무(金贊武)의 처 진양 유씨(晉陽柳氏)는 어려서부터 효성이 지극하였고 부덕을 갖추었다. 13세에 어머니 한씨가 중병에 걸려 위독해지자 손가락을 베어 피를 입에 흘려 넣어 회생시켰다. 시집가서는 남편이 중병에 걸려 위독해지자 자신의 허벅지살을 베어 구워 먹여 소생시켰고, 3일 뒤에 병세가 심해지자 또 손가락을 베어 피를 입에 흘려 넣어 남편의 병을 낫게 했다.

유계주(劉啓周)의 처 전주 이씨(全州李氏)는 남편이 3년 동안 병들었을 때 백방으로 정성을 다하여 구완하였으나 죽게 되자 슬픔으로 상을 치렀다. 다시 시아버지가 병들게 되자 똥의 감고(甘苦)를 맛보며 봉양하였고, 시어머니가 병들자 하늘에 백일기도를 하였다. 기도를 하는 도중 호랑이가 나타나 그녀가 “네가 장차 나를 잡아먹으려 하느냐?”라고 꾸짖자 호랑이가 머리를 저으며 오른 발로 수염 몇 가닥을 뽑아주고 갔다. 이 수염을 달여 시어머니에게 올리자 시어머니의 병이 나았다.

조우현(趙禹顯)의 처 평산 신씨(平山申氏)는 어느 날 남편이 병을 얻어 몇 번이나 혼절하자 신씨가 자신의 오른쪽 허벅지를 베어 피를 먹이니 효험이 있었다. 이에 신씨는 왼쪽 허벅지까지 베어 남편에게 피를 마시게 하고 살까지 베어 먹였다. 신씨의 이 같은 정성으로 남편은 병에서 완쾌하였다. 하지만 몇 년 뒤 이전의 증세가 다시 재발하자 신씨는 자신의 장딴지를 잘라 살을 먹게 하고 피를 마시게 하였다. 이에 남편은 병에서 완쾌되어 부부가 팔순에 이를 때까지 해로(偕老)하였다.

허수(許樹)의 처 진양 정씨(晉陽鄭氏)는 한 밤중에 호랑이가 방에 들어와 남편을 물고 달아나자, 남편의 다리를 잡고 또 호랑이의 꼬리를 붙잡은 채 넘어지며 5리를 따라갔다. 결국 남편은 죽었지만 끝까지 따라 가서 남편의 시체를 업고 돌아왔다.

[참고문헌]
등록된 의견 내용이 없습니다.
네이버 지식백과로 이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