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620079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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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獨立運動家 |
영어공식명칭 | Independence Fighter |
분야 | 역사/근현대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
지역 | 경상남도 함안군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집필자 | 양미숙 |
[정의]
일제 강점기 독립을 위해 투쟁한 함안 출신의 항일 운동가.
[개설]
함안의 독립운동가는 3·1 운동과 3·1 운동의 영향을 받은 독립운동을 통해 활동을 파악할 수 있다. 함안의 3·1 운동은 경상남도에서 제일 먼저 시작되었다. 1919년 3월 9일 칠북면 이령리연개 장터 만세 운동을 시작으로 함안 지역의 연속적이고 공세적인 시위가 잇달아 일어났다. 함안 지역에서 전개된 3·1 운동은 기본적으로 고종의 장례식에 참가한 조한휘(趙漢輝), 한종순(韓鍾淳), 이찬영(李讚榮), 조병흠, 박건병, 강기수, 한관렬(韓灌烈) 등이 귀향하여 서울의 독립운동 소식이 전해지면서 시작되었다. 이렇게 준비된 함안3·1 운동은 치밀하고 연속성을 가지면서 각계각층에서 참가한 그야말로 전 군민적 만세 운동이었다.
[3.1 운동을 주도한 독립운동가]
3월 9일 칠북면 이령리연개 장터 만세 운동을 시작으로 4월 13일 칠원면구성리 시장 만세 운동에 이르기까지 함안 지역 내에서 모두 11회의 만세 운동이 전개되었고, 1만 2000여 명 넘는 사람들이 시위 운동에 참가하였으며, 한 달여 간 연속적으로 전개되었다. 이 과정에서 시위 현장에서 순국한 사람이 20여 명으로 삼남 지방에서 제일 많았으며, 일본 군경의 피해 규모는 군 단위로는 전국 1위를 차지할 만큼 만세 운동이 치열하게 전개되었다.
함안 지역의 3·1 운동은 이후 함안 지역 내에서 일어난 항일 운동의 원동력이 되었다. 이인구(李寅九)는 1919년 3월 19일 함안읍 만세 운동에 참가한 사람이었다. 함안읍 만세 운동에서 검거되어 3년의 옥고를 치렀는데, 1924년 2월 19일 여항면 외암 마을에 사는 손씨 집 처녀를 일본 경찰이 밀실에 가두고 능욕을 보이려 하는 것을 이인구가 막았다. 이에 앙심을 품은 일본 경찰은 이인구를 피살하였고, 피살 장면을 목격한 이인구의 아내 조씨는 일본 경찰을 때려 죽인다. 조씨는 징역 4년 형을 선고 받았다. 현재 함안군 가야읍아라 공원에 군민 성금으로 열녀비가 세워져 있다.
군북면은 함안 지역 내에서도 3·1 운동이 격렬한 곳이었다. 군북 공립 보통학교 교사 김두영과 당시 조선 일보사 기자이며 함안 지국 국장을 겸하고 있던 안창준의 지도를 받은 조정제, 조현제, 이덕환 등 30여 명의 6학년 학생이 중심이 되어 시위가 계획되었다. 1932년 2월 29일 군북 장날에 군북 보통학교 4~6학년 280여 명이 요구 조건을 학교에 제출함과 동시에 시위행진을 하면서 전단지를 뿌렸다. 주동자 대부분이 학생들이므로 훈방 조치되었으나, 취업과 진학에 많은 불이익을 받았다. 시위에 가담한 학생 중 조정제는 만주로 망명하여 군관 학교를 졸업하고 독립운동에 참여하였다.
[3.1 운동 이후 독립운동가]
1932년 조선 농민 총동맹 함안 농민 조합 군북 지부 간부 동촌리의 조강제, 김용수와 신창의 조영제, 조복래 등은 모세(牟稅)와 지세(地稅)의 납부 반대와 소작권 이동 반대 등을 외치며 일제의 경제적 수탈에 정면으로 도전하였다. 이들은 검거되어 부산 지방 법원 마산 지청에서 징역 6개월 형을 선고 받고 대구 복심 법원에 항소하였으나 징역 6개월 형에 집행 유예 2년을 선고 받았다.
함안군 군북면 동촌리 신창에 있던 동창 야학교는 동촌리 서호의 정사인 문창재를 교실로 하고 조성욱, 조성립, 조영제를 교사로 초빙하였다. 학생 수는 약 100명이었고 1929년 개교하였다. 농촌 청소년의 문화 계몽과 독립 정신을 고취하여 오다가 1931년 가을에는 마을 유지들이 힘을 모아 교실 4칸, 사무실 1칸을 마련하였다. 마을 유지들은 운영비를 보조하고 학교 신축비를 모았으며 돈을 내지 못하는 주민은 노동력을 제공하였다. 1932년 말부터 학교가 폐쇄되기까지 조용균이 학교 운영비를 부담하였다. 1935년에는 학교 폐쇄령이 내려졌고, 교사 전원이 체포되어 혹독한 고문과 옥고를 치렀다.
일제는 함안 지역의 항일 운동을 사전에 예방하기 위해서 법수 공립 심상 소학교를 강주리 면사무소 옆에서 법수면 경찰관 주재소 옆인 우거리로 이전할 계획을 세웠다. 이 계획을 통보 받은 강주, 대송, 백산, 사정, 황사리 주민들은 대표자를 선정하여 당시 함안 군수인 김학성에게 부당함을 건의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지역 대표자들은 이에 굴복하지 않고 함안 군청과 경상남도에 진정서를 제출하였다. 그러나 조선 총독부는 지역 대표자들의 요구를 묵살하였다. 이에 격분한 지역민 200여 명은 1939년 4월 28일 면사무소에 모여 면장을 납치, 면사무소를 나와 의령읍으로 행진하였다. 시위 군중이 의령읍으로 향한 이유는 그날이 의령 장날이므로 장에 모인 사람들과 합류하여 대규모 시위를 이끌기 위함이었다. 시위대가 정암 철교를 건너 백야 마을을 지나는 다리목에서 함안 경찰에게 검거되었다. 이때 하고봉, 이태형, 박천수, 박명수, 황수을 등 17명이 소요, 공무 집행 방해, 상해 등의 죄목으로 유죄 판결을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