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인구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6200835
한자 李寅九
영어공식명칭 I Ingu
분야 역사/근현대
유형 인물/의병·독립운동가
지역 경상남도 함안군 여항면 외암리
시대 근대/개항기,근대/일제 강점기
집필자 노익환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출생 시기/일시 1877년 10월 26일연표보기 - 이인구 출생
활동 시기/일시 1919년 3월 19일 - 이인구 함안읍 만세 운동 주도
몰년 시기/일시 1924년 2월 17일연표보기 - 이인구 사망
추모 시기/일시 1977년 - 이인구 대통령 표창 추서
추모 시기/일시 1991년 - 이인구 건국 훈장 애족장 추서
관련 사건 시기/일시 1919년 3월 19일 - 이인구 함안읍 만세 운동 주도
출생지 경상남도 함안군 여항면 외암리
거주|이주지 경상남도 함안군 여항면 외암리
성격 독립운동가
성별

[정의]

일제 강점기 함안 출신의 독립운동가.

[활동 사항]

이인구(李寅九)[1877~1924]는 함안군 여항면 외암리에서 태어났다. 고종의 장례식에 참배하기 위해 상경하였다가 독립 선언식과 독립 만세 운동에 참여하고 귀향한 조한휘(趙漢輝)[한학 교사], 한종순(韓鍾淳)[당시 함안 면장 아들], 박건병(朴鍵秉)[동명 학교 교사] 등에게서 서울의 독립운동에 대해 전해 들었다. 한종헌(韓鍾憲) 등 젊은 지사들과 함안군 대산면의 안지호(安知鎬) 등 원로 지사들의 자문을 얻어 3월 19일 함안읍 장날을 거사일로 결의하고 태극기와 독립 선언서를 제작하는 한편 계획을 각지에 알렸다. 이인구도 이 계획에 동참하였다.

1919년 3월 19일 1시경 비봉산에서 고천제(告天祭)를 올리고, 이희석이 태평루에서 독립 선언문을 낭독한 후 3,000여 명의 군중이 주재소와 군청으로 시위행진을 하며 함안읍 만세 운동이 일어났다. 안지호는 사전에 제작한 태극기와 대한 독립가를 들고 시위대를 독려하다가 연행되었다. 이때 이인구는 시위 행렬의 선두에서 군중을 지휘하였다. 마산 경찰 서장 기타무라[北村]와 현지 경찰들이 무력을 행사하려 하자, 군중은 주재소의 공문서를 파기하고 유치장의 안지호를 탈출시켰다. 군중들은 군청 안으로 들어가서 군수 민인호(閔麟鎬)와 경찰관을 붙잡아 시위 운동 증명서를 요구하고 제복과 모자를 벗기고 독립 만세를 외치도록 하였다. 이용우(李龍佑)는 시위 군중과 함께 등기소, 우편소, 일본인 소학교를 습격하여 각종 공문서를 파기하고 건물을 파괴하였다.

당시 조한국(趙漢國), 강상중(姜相中)은 마산의 일본군 수비대와 연락되는 전화선을 끊어 놓았다. 오후 5시 40분경 함안으로의 전화가 불통되자 비상 사태가 돌발한 것으로 짐작하고 마산 중포병 대대 병력 16명이 도착하여 현지 경찰과 시위 주동자를 검거하였다. 이인구도 이때 체포되어 8월 15일 부산 지방 법원 마산 지청에서 보안법 위반으로 3년 형을 선고 받고 옥고를 치렀다. 이인구함안군 여항면 외암리에서 일본 경찰에게 농락당하는 마을 처녀를 구하려다가 이를 저지하던 일본 경찰에게 1924년 2월 17일 47세의 나이에 살해되었다.

[상훈과 추모]

1977년 대통령 표창, 1991년 건국 훈장 애족장이 추서되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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