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620083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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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李在衡 |
영어공식명칭 | I Jaehyeong |
이칭/별칭 | 경행(景行) |
분야 | 역사/근현대 |
유형 | 인물/의병·독립운동가 |
지역 | 경상남도 함안군 군북면 소포리 |
시대 | 근대/개항기,근대/일제 강점기 |
집필자 | 노익환 |
[정의]
일제 강점기 함안 출신의 독립운동가.
[활동 사항]
이재형(李在衡)[1886~1919]은 함안군 군북면 소포리에서 태어났으며, 자는 경행(景行)이다. 군북면 사무소가 개소될 때 면 서기로 취직하였다. 겉으로는 일제의 식민 정책에 응하였으나, 실제로는 조국의 광복을 도와 일본 경찰의 주목을 받아 왔다. 3·1 운동 이후 일제의 삼엄한 감시에도 군북 시장 만세 운동이 성공하게 된 까닭은 함안읍 면 서기 조재우(趙在祐)와 군북의 이재형이 일본 경찰의 동태를 미리 전하였기 때문이다. 이재형은 의거 전날 면 사무소에서 숙직하면서 군북면 경찰 주재소의 동태를 살폈고, 다음 날 아침 8시에 의거 주동자들과 합류하여 함안군 군북면 동촌리(東村里)의 신창 야학교의 독립 선언식에 참여하였다.
1919년 3월 20일 군북 시장 만세 운동은 오전 9시 신창 야학교에서 50여 명 학생들의 시작을 신호로 군북 장터에 있던 군중이 일제히 궐기하면서 일어났다. 오후 1시경 3,000여 명의 군중이 대대적으로 만세 운동을 전개하자 군북 경찰 주재소의 경찰과 파견되었던 마산 중포병 대대 병력 16명이 공포를 발사하여 시위 대열을 해산시켰다. 오후 5시경 군중은 5,000여 명으로 늘어나 경찰 주재소로 달려갔다. 사태의 급박함을 느낀 일본 경찰이 공포를 발사하자 군중은 투석으로 주재소의 유리창과 벽을 파괴하였다. 다시 일본 군경은 시위대에 조준 사격을 감행하여 현장에서 21명이 순국하고 18명이 중상을 입었다. 이때 선두에서 격렬한 만세 시위를 전개하던 이재형도 적의 흉탄을 맞고 현장에서 순국하였다. 이재형은 이구현(李九鉉)을 양자로 삼아 가계를 이었고 손자 이환진(李煥珍), 이환옥(李煥玉), 증손 이용선(李容善), 이태기(李泰基), 이정기(李正基) 등이 있다.
[상훈과 추모]
1977년 대통령 표창, 1991년 건국 훈장 애국장이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