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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5600004
한자 和順大谷里靑銅器一括
이칭/별칭 화순 대곡리 청동기 시대 유물, 화순 대곡리 유적 출토 청동기
분야 역사/전통 시대,문화유산/유형 유산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지역 전라남도 화순군 도곡면 중한실길 51[대곡리 312]
시대 선사/청동기
집필자 이영문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발굴 조사 시기/일시 1971년 12월 24일 - 화순 대곡리 유적 국립 중앙 박물관에서 긴급 수습 조사
문화재 지정 일시 1972년 3월 2일연표보기 - 화순 대곡리 청동기 일괄 국보 제143호로 지정
문화재 지정 일시 2021년 11월 19일 - 화순 대곡리 청동기 일괄 국보 재지정
발굴 조사 시기/일시 2004년 12월연표보기 - 화순 대곡리 유적 전남 대학교 박물관 GPR 반응 조사 시작
발굴 조사 시기/일시 2005년 3월연표보기 - 화순 대곡리 유적 전남 대학교 박물관 GPR 반응 조사 완료
발굴 조사 시기/일시 2008년 2월 13일 - 화순 대곡리 유적 국립 광주 박물관에서 재발굴 조사 시작
발굴 조사 시기/일시 2008년 2월 21일 - 화순 대곡리 유적 국립 광주 박물관에서 재발굴 조사 완료
소재지 대곡리 청동기 시대의 유물 - 전라남도 화순군 도곡면 중한실길 51[대곡리 312]지도보기
출토 유물 소장처 국립 광주 박물관 - 국립 광주 박물관
문화재 지정 번호 국보

[개설]

화순 대곡리에 있는 청동기 시대 유적은 세형동검과 잔무늬 거울을 비롯한 다량의 청동기가 부장된 무덤 유적이다. 대곡리 청동기 유적에서 청동 팔주령 2점, 청동 쌍두령 2점, 잔무늬 거울 2점, 세형동검 3점, 청동 도끼 1점, 청동 새기개 1점 등 총 11점의 청동 유물이 일괄로 출토되어 현재 국보 제143호로 지정되었다. 그 후 세형동검 2점이 더 발견되어 모두 6종 13점의 청동기가 출토되었다.

[드넓은 화순 평야에 위치한 화순 대곡리 유적]

화순 대곡리 유적비봉산의 북쪽 기슭에 자리하고 있는데, 유적은 비봉산 북측 사면의 평탄한 구릉에 있다. 마을 입구에는 칠성 바위라 불리는 6기의 고인돌이 있고, 마을 앞으로는 영산강의 지류인 지석천이 북동-남서 방향으로 관류하면서 화순 군내에서 가장 넓은 화순 평야가 펼쳐져 있다.

청동 유물이 출토된 곳은 구릉 정상부에 약간 못 미친 지점의 서쪽 사면으로 화순군 도곡면 대곡리 중대곡 마을 198번지에 위치한다. 이 일대에는 청동기 시대 무덤인 고인돌이 집중 분포되어 있고, 세계 문화유산으로 등재된 화순 고인돌과도 인접해 있다. 이곳은 선사 시대부터 살기 좋은 강변 충적지를 포함한 분지형 지형을 형성하고 있으며, 역사 시대에도 여래비리국, 능성군, 능성현, 능주목이 자리한 곳으로 화순 지역에서 가장 중심 지역이다.

[청동 유물이 발견되기까지]

청동 유물이 무더기로 발견된 대곡리 청동 유물은 1971년 12월 20일 엿장수가 전라남도청에 신고하여 알려지게 되었다. 처음 발견한 사람은 이 마을에 살던 구재천으로 밝혀졌다. 유물의 출토 지점은 바로 구재천 집안의 헛간[창고]의 담과 그 밖에 걸쳐 있어, 헛간으로 스며드는 빗물이 마당으로 유입되는 것을 막기 위해 담 밖에서 배수구 작업을 하다가 발견하였다고 한다. 이곳은 구릉 정상부로 암반층을 형성하고 있는데, 이 암반층 안에 묻혀 있는 돌무지를 제거하는 과정에서 나타난 것이다.

전라남도청으로부터 신고를 받은 문화재 연구소에서는 전라남도청 문화 공보실에 보관중인 청동 유물을 조사하기 위해 당시 국립 문화재 연구소 조유전 학예 연구사를 파견하여 신고 나흘 뒤인 1971년 12월 24일 대곡리 현장 조사를 실시하게 되었다. 내부 조사에서는 통나무를 이용한 목관 흔적과 목관을 보호하는 깬돌까지 확인하고, 하루 만에 수습 조사를 끝냈다. 신고 된 청동 유물은 동검이 3점, 8개 방울이 달린 청동 팔주령이 2점, 아령 모양으로 양쪽에 방울이 달린 청동 쌍두령이 2점, 조각칼의 일종인 청동 새기개 1점, 청동 도끼 1점과 함께 잔무늬 거울 2점 등 모두 11점이었다. 당시 한국 고고학계에서 최대의 발견 유물로 평가되어 1972년 3월 2일 국보 제143호로 지정되었고, 2021년 11월 19일 문화재청 고시에 의해 문화재 지정번호가 폐지되어 국보로 재지정되었다.

이후 2004년 전남 대학교 박물관에서 대곡리 청동 유물 출토 지점 주변 지역을 대상으로 GPR 반응 조사를 포함하여 시굴 조사를 실시하였으나 새로운 유구는 확인되지 않았다. 대곡리 청동 유물 출토 지점에 대한 주변 정화 사업과 유적 정비 복원을 위한 기초 자료를 확보하기 위해 2008년 2월 13일부터 21일까지 국립 광주 박물관에 의뢰하여 재조사를 실시하였다. 이 조사에서 유구의 확인과 통나무 목관의 규모, 관외 부장된 세형동검 2점이 조사되었다.

[청동 유물의 고고학적 가치]

청동기가 출토된 유구는 풍화된 자연 암반을 파고 조성되어 있다. 묘광은 상하 2단인데, 위의 1단은 동서 330㎝, 남북 280㎝의 평면 방향에 가까운 형태이고, 깊이는 동쪽 85㎝ 정도이다. 그 내부에 더 좁은 묘광을 조성하였으며, 크기는 동서 230㎝, 남북 105㎝, 깊이 65㎝의 평면 장방형이다. 1단 굴광의 남쪽에서 발견된 돌무지는 동서 200㎝. 남북 75㎝ 범위로 발견되었다. 이 돌무지는 담장 하부에 위치하고 있었기에 매장 절차 후 채운 원래의 상태로 잘 보존될 수 있었던 것으로 판단된다. 적석은 3~4단으로 높이는 45㎝ 정도인데, 일정한 정형은 확인되지 않으며 돌의 크기는 대략 20~50㎝로 다양한 편이다.

묘광의 하부에서는 통나무 목관 바닥 흔이 관찰되는데 범위는 동서 115㎝, 남북 40㎝ 내외이며 서쪽 끝부분에서도 일부 흔적이 보인다. 목관 흔적 밖에는 25㎝ 내외의 할석이 묘광 북쪽 측면에 잇대어 1열로 놓여 있다. 채움 돌과 목관 사이에는 두께 10㎝ 내외의 회백색 진흙이 발라져 있다. 통나무 관의 크기는 길이 180㎝, 너비 60㎝로 시신을 펴서 묻는 신전장(伸展葬)이 가능한 규모이다.

처음 유물을 수습한 구재천의 전언에 의하면 목관의 동남쪽 모서리에 잔무늬 거울 2점, 목관의 서북쪽에 세형동검 1점과 서남쪽 끝에 세형동검 2점이, 동쪽으로 팔주령 2점과 쌍두령 2점이 나란히 놓이고, 서쪽에 청동 새기개와 청동 도끼가 놓여 있었다고 한다. 그리고 2008년 조사 때 통나무 관을 해체하는 과정에서 남벽석 가까이의 통나무 관 밑에 놓인 세형동검 2점이 발견되었다. 이 동검은 관외 부장으로 확인되었다. 세형동검이 포개진 채 발견되었으며, 동검 양면에 흑칠한 목질 흔적이 확인되었다. 이는 흑칠한 나무 칼집에 넣어 부장한 것으로 추정된다. 이처럼 통나무 관을 안치하고 그 바깥에 동검을 부장한 것은 당시 매장 의례나 매장 풍습의 단면을 보여주는 것이다.

[서남 해안의 대표적인 청동기 문화]

화순 대곡리 유적의 무덤은 돌무지 나무 널무덤[적석 목관묘(積石木棺墓)]이다. 토광을 파고 통나무 관을 안치한 다음 그 공간을 깬돌로 메우고 그 위에 깬돌을 쌓아 만든 무덤이다. 돌무지 나무 널무덤에는 많은 청동 유물이 부장되어 있으며, 대전 괴정동, 아산 남성리, 예산 동서리, 부여 구봉리 등 주로 금강 유역과 충청 서해안 지역에서 집중적으로 발견되는 형태의 무덤이다. 전라남도 지방에서는 화순군 대곡리와 함평군 초포리에서 발견되었다. 대곡리에서 발견된 무덤은 전라남도 지방에서 처음으로 청동기 유물이 일괄로 출토된 유적이며, 이를 계기로 금강 유역 등 서남해안 지역과 함께 하나의 청동기 문화가 형성되었음을 입증해 주었다.

화순 대곡리 유적에서 출토된 청동 유물은 검과 같은 무기류, 새기개나 도끼와 같은 생활 연모, 방울 소리를 내는 팔주령과 쌍두령, 그리고 청동 거울 등은 청동기 시대 제사에 사용된 도구들이다. 청동 거울에는 동심원, 삼각집선문이 시문되어 있다. 2점의 팔주령은 매우 흡사한 형태와 문양을 가졌지만 중앙부 무늬가 달라 서로 다른 거푸집으로 제작했음을 알 수 있다. 팔주령의 중앙부에는 태양을 상징하는 햇살 무늬가 새겨져 있다.

화순 대곡리 유적의 무덤에는 다양한 청동기가 부장되어 있는데, 의기나 무기가 주를 이루고 있어 제사를 관장하면서 일정 지역을 통치한 정치적 지배자의 출현을 입증하는 것으로 보인다. 무덤 지배자는 일정한 지역을 통치하는 지역 공동체의 수장으로 지역 내의 이해관계를 조정하는 조정자의 역할을 담당하였을 것으로 보인다. 또 지역을 대표하여 제사를 집행하며, 타 지역과의 교섭, 교역의 주체로 정치적 권위와 권력을 강화해 나가 세습적인 수장권을 형성하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수습된 목관편을 시료로 하여 측정한 방사성 탄소 연대는 2560±120B.P.이다. 이로 보면 화순 대곡리 유적의 시기는 기원전 600년 무렵이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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