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560092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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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梁應鼎 |
이칭/별칭 | 공섭(公燮),송천(松川)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문무 관인 |
지역 | 전라남도 화순군 |
시대 | 조선/조선 전기 |
집필자 | 권수용 |
출생 시기/일시 | 1519년 - 양응정 출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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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동 시기/일시 | 1540년 - 양응정 생원시 급제 |
활동 시기/일시 | 1552년 - 양응정 문과 급제 |
활동 시기/일시 | 1556년 - 양응정 중시 급제 |
활동 시기/일시 | 1557년 - 양응정 공조 정랑 파직 |
활동 시기/일시 | 1560년 - 양응정 복직 |
활동 시기/일시 | 1578년 - 양응정 공조 참판 파직 |
몰년 시기/일시 | 1581년 - 양응정 사망 |
거주|이주지 | 양응정 이주지 - 광주광역시 광산구 박호동 |
묘소|단소 | 양송천 묘소 - 광주광역시 광산구 동호동 산 32-2 |
성격 | 문신 |
성별 | 남 |
본관 | 제주(濟州) |
대표 관직 | 공조 참판|대사성 |
[정의]
조선 전기 화순 출신의 문신.
[가계]
본관은 제주(濟州). 자는 공섭(公燮), 호는 송천(松川). 양담(梁湛)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양이하(梁以河)이고, 아버지는 교리 양팽손(梁彭孫)이며, 어머니는 금산 김씨(錦山金氏) 김섬(金銛)의 딸이다. 동래 부사 양응태(梁應台)의 아우로 능주 월곡리에서 태어났다.
[활동 사항]
양응정(梁應鼎)[1519~1581]은 재주와 지혜가 총명하여 5세에 박학에 힘쓰니, 백인걸(白仁傑)·신잠(申潛)·김인후(金麟厚)·기대승(奇大升) 등이 ‘원대한 그릇이요, 경세제민할 재인’으로 칭찬하였다. 1540년(중종 35)에 생원시에 장원을 하고, 1552년(명종 7)에 문과에 급제하여 검열(檢閱)이 되었으며, 또 공조 좌랑으로 1556년(명종 11)에 중시(重試)에 장원을 하여 호당(湖堂)에 들어갔다. 이듬해 공조 정랑으로 있을 때 당시 권신이었던 윤원형(尹元衡)에 의하여 김홍도(金弘度)와 함께 탄핵을 받고 파직 당하였다가 1560년에 다시 복직되었다. 그 뒤 수찬(修撰)과 진주 목사를 거쳐 1574년에 경주 부윤으로 재직 중, 진주 목사로 있을 당시 청렴하지 못하였다는 대간의 탄핵으로 파직되었다. 1578년에 공조 참판으로 기용되어 성절사로 명나라에 갔으나 부정을 저질렀다는 이유로 다시 파직되었다가 대사성에 복직되었다.
나주[현재 광주광역시]의 박산(博山)에 이거하여 조양대(朝陽臺)와 임류정(臨流亭)을 짓고 강학하며 후학을 길렀다. 이때 정철, 백광훈, 최경창, 최경회와 같은 석학을 배출하였으며, 고경명과 김천일도 종유하였다. 일찍이 시관이 되어 율곡 이이를 발탁하니 명나라 사신이 칭탄하였다. 시문에 능하여 선조 때 8문장의 한 사람으로 뽑혔다. 죽었을 때에는 관리를 보내어 치제(致祭)를 하였다.
[학문과 저술]
저서로는 『송천집(松川集)』·『용성 창수록(龍城唱酬錄)』이 있다.
[묘소]
묘는 광주광역시 광산구 동호동 산 32-2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