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560088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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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文武官人 |
이칭/별칭 | 문신,무신,문관,무관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
지역 | 전라남도 화순군 |
집필자 | 권수용 |
사우 | 포충사 - 전라남도 화순군 한천면 모산리 산 1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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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우 | 삼충각 - 전라남도 화순군 능주면 잠정리 산 33-1 |
사우 | 삼충사 - 전라남도 화순군 화순읍 다지리 |
사우 | 늑정사 - 전라남도 화순군 화순읍 삼천리 늑정 |
사우 | 충효사 - 전라남도 화순군 도암면 벽지리 790 |
누정 | 학포당 - 전라남도 화순군 이양면 쌍봉리 411 |
누정 | 임대정 - 전라남도 화순군 남면 사평리 599 |
누정 | 물염정 - 전라남도 화순군 이서면 창랑리 물염 |
누정 | 송석정 - 화순군 이양면 강성리 |
누정 | 고사정 - 전라남도 화순군 화순읍 삼천리 11 |
누정 | 정곡정 - 전라남도 화순군 화순읍 서태리 |
누정 | 금사정 - 전라남도 화순군 이서면 야사리 |
재실 | 영모재 - 전라남도 화순군 화순읍 감도리 |
재실 | 영모재 - 전라남도 화순군 화순읍 삼천리 막장동 |
재실 | 영사재 - 전라남도 화순군 화순읍 세량리 |
재실 | 충의재 - 전라남도 화순군 화순읍 주도리 |
재실 | 영성재 - 전라남도 화순군 춘양면 양곡리 |
재실 | 대종합 - 전라남도 화순군 도곡면 대곡리 한수동 |
재실 | 북애정 - 도곡면 죽청리 |
재실 | 호동재 - 도곡면 대곡리 |
재실 | 효사재 - 전라남도 화순군 동복면 독상리 산23 |
정려 | 삼강정려각 - 전라남도 화순군 도암면 정천리 |
[정의]
전라남도 화순이 배출한 고려 시대부터 조선 시대까지의 문관과 무관
[개설]
문무 관인이란, 문관이나 무관을 역임한 관인을 말한다. 고려나 조선 시대의 관직 운영은 크게 문관과 무관의 두개의 반열을 두었고, 이를 합쳐 양반이라 불렀다. 조회 시에 국왕을 중심으로 동쪽에는 문반, 서쪽에는 무반이 정렬하였기 때문에 이를 동반 혹은 서반이라 부르기도 했으며, 이런 제도는 고려에서부터 비롯되어 조선 말기까지 이어졌다. 976년(경종 1)에 관인들에게 전지(田地)와 시지(柴地)를 지급할 때 문반·무반·잡업으로 구분하였던 것에서 비롯되었는데, 그 뒤 995년(성종 14)에 모든 문·무관에게 문산계를 수여하면서 제도상 확립되었다. 그러다가 고려 중기에 들어와 문·무 양반 관료 체제가 정비되면서 두 개의 반열이 양반층을 형성하면서 점차 신분 개념으로 확대되어 갔다. 고려 문종 대까지 무관의 계급 체계인 무산계가 독립되지 못한 가운데 문산계 체제 속에 포함되어 있었고, 조선 건국 초부터 무관들의 계급 규정인 무산계가 독립되어, 『경국대전』 편찬과 아울러 문무 관인에게 부여되는 문·무산계 체계가 확립되었다. 정1품에서 종9품에 이르기까지 표시한 계급 명칭은 고려와 조선 시대가 달랐지만, 운영상에 있어 큰 차이는 없었다. 따라서 자신의 품계에다 관직을 맞추어 임용된 문무 관인들이 실질적인 양반이었다.
화순군의 문무 관인에 관한 자료는 『오성지(烏城誌)』, 『호남지』[화순현지], 『신증오성지(新增烏城誌)』, 『화순군지』, 『동복현 읍지(同福縣邑誌)』, 『동복군 읍지(同福郡邑誌)』 등으로, 이 자료를 통하여 화순군에서 문인과 무인의 관직에 오른 인물명을 파악할 수 있다.
[화순의 문무 급제자 현황]
화순군은 원래 능주, 화순, 동복 세 고을로 이루어져 있었기 때문에 인물 또한 많다. 우선 화순의 문무 관인을 살펴보면, 최초로 입록된 사람은 최선복이다. 이후 간행된 『오성지(烏城誌)』[1760~1765 추정]는 문과와 무과 인물이 구별되어 실려 있는데, 문과 인물로는 최선복, 최사로, 최한정, 최한원, 김공희, 배한형, 조대중, 이방준, 최홍재, 조수홍, 장희성, 한후, 조정, 최신헌, 최원, 조선휘 등 16명이 실려 있다. 『호남지』 화순현지[1871]에는 『오성지』에 있던 최홍재, 장희성이 빠지고, 조세영, 조경중, 신몽필, 배경후, 최시순이 새롭게 입록되어 19명이 실려 있다. 『신증 오성지(新增烏城誌)』[1913]에는 화순 읍지에 빠졌던 최홍재와 장희성이 다시 입록되고, 임진왜란 때의 의병장이었던 최경장과 최경회가 입록되었으며, 배진명, 조경수, 조희유, 조상진이 새롭게 입록되어 27명이 실려 있다. 『화순 군지』[1980]에는 최계, 최계신, 최영유, 최원지, 최자해, 공규, 이석공, 조건, 조세덕, 최한후, 최선문, 최운, 임시익, 조경유 등 14명이 새롭게 입록되고, 대신 앞 읍지에서 입록되어 있던 이방준, 장희정, 조상진은 빠져서 38명이 실려 있다.
무관으로는 『오성지(烏城誌)』[1760~1765 추정]에는 오천, 이석공, 이사종, 임대년, 이사형, 전승천, 김경생, 김홍신, 최기종, 임재, 조정화, 조정리, 최췌, 최진, 최이태, 최중해, 조선적, 유여룡, 전영신, 이인성, 오인건, 송재서 등 22명이 입록되어 있으며, 『신증오성지』[1913]에도 내용이 같다. 그러나 『화순 군지』[1980]에는 32명이 올라 있다.
[능주의 문무급제자 현황]
능주의 문무 관인은 그동안의 읍지류에는 구별하지 않았다. 『화순 군지』[1980]에 문관으로 구존유, 조직, 구민첨, 조사단, 구인, 구천용, 구예, 조추재, 조저, 구영량, 조천좌, 구환, 구치관, 문상행, 배두유, 박울, 양팽손, 양응태, 양응정, 배상형, 구방경, 박지수, 형승윤, 문시룡, 배현, 문봉익, 양덕호, 양석관, 이약수, 김의표, 구본순 등 31명이 올라 있고, 무관으로는 32명이 올라 있다.
[동복의 문무급제자 현황]
동복의 문무 관인 중 문관으로는 『동복현 읍지(同福縣邑誌)』[1789]에 강결, 한후, 하윤구, 하보선, 정인례, 정맹덕, 정여림, 나무송, 정동한, 나충좌, 송중현 등 11명이 입록되어 있고, 『호남지』 동복현지[1871]에 민주현, 김용우, 이약수, 송익면이 추가되어 15명이 입록되어 있으며, 『동복군 읍지(同福郡邑誌)』[1899]에 송재회, 오계련이 추가되어 17명이, 『동복지(同福誌)』[1964]에 송정순, 나무춘, 송수겸, 강인회, 김진휴 등 5명이 더 추가되어 22명이 입록되었다. 한편 『화순군지』[1980]에는 장희성이 새로이 들어가고, 강결, 한후, 정동한, 이약수, 김용우, 강인회, 김진휴 등은 빠졌다. 동복의 무관은 『동복현 읍지』에는 30명, 『동복군 읍지』에는 35명이 올라 있고, 『동복지』에는 47명이 올라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