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560049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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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壬辰倭亂 |
분야 | 역사/전통 시대 |
유형 |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
지역 | 전라남도 화순군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문안식 |
성격 | 전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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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 인물/단체 | 최경회 |
[정의]
1592년에서 1598년까지 2차에 걸쳐 일본이 조선을 침입하여 전라남도 화순 지역을 포함한 조선 전역에서 일어난 전쟁.
[개설]
1592년(선조 25) 4월 13일 부산포에 도착한 왜군은 경상도 지역 주요 고을을 차례로 점령하였다. 화순군을 비롯한 전라도 일대는 왜군의 직접적인 침입을 받지는 않았으나 전직 관료, 양반 유생, 일반 백성들이 의병을 일으켜 항쟁에 나섰다. 최경회(崔慶會)[1532~1593] 등 화순현과 능성현 출신의 의병장은 호남 의병의 대명사로 일컬어지고 있다.
[역사적 배경]
임진왜란 전에 조선의 국내 정세는 여러 가지 어려움에 직면해 있었다. 정치적으로 붕당 정치의 폐단, 경제적으로 과전법 폐지로 인한 토지 제도 문란, 군사적으로 병농 일치제의 붕괴에 따른 군적 수포제(軍籍收布制) 실시로 인한 혼란에 직면하였다. 명과는 사대 외교로 일관하였으며 일본과는 1510년(중종 5) 삼포왜란(三浦倭亂) 이후 강경책을 유지했다. 1555년(명종 10)에 일어난 을묘왜변(乙卯倭變)은 일본과 교역 단절로 이어졌다.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1536~1598]는 대륙 침략의 야망을 실현하고, 강한 군사력을 보유한 다이묘[大名]들의 불만을 국외로 분출시켜 국내 안전을 도모하고자 조선을 침략하였다. 조선은 전쟁터로 변모하여 참혹한 피해를 당하였다. 호구와 전결의 감소는 물론 중요 문화재의 유실, 사회 경제의 침체 등을 가져 왔으며, 전후에는 일본에 대한 적개심과 명에 대한 모화심이 고조되었다.
임진왜란은 외침의 규모나 그 피해에 있어서도 우리 역사에서 유례를 찾아보기 힘든 심각한 영향을 끼쳤다. 또한 전란 초기에는 왜적의 침입에 맞서 관군의 역할보다 의병의 활동이 두드러졌다. 이들 의병을 규합하고 조직하여 왜병을 격퇴시킨 의병장은 대부분 문신 유생들이었으며, 의병장의 숫자가 많고 의병 활동이 활발하게 전개되었던 곳은 전라도와 경상도 일대였다. 화순 지역 역시 최경회를 비롯하여 수많은 의병장들이 국난을 극복하기 위해 거병을 하여 목숨을 바쳤다.
[경과]
임진왜란 초기에 관군이 여러 전투에서 패배하고 물러서자 호남의 각지에서 의병이 봉기하였다. 광주 지역에서는 고경명(高敬命)이 5월 29일 기병하였다. 김천일(金千鎰)[1537~1593]은 전라남도 나주 지역, 김제민(金齊閔)[1527~1599]은 전라남도 장성 지역, 변사량은 전라남도 남원 지역에서 각각 기병하였다. 김천일과 고경명은 전라도 지역의 초기 의병장으로서 쌍벽을 이루었고, 이에 전자를 전라우도 의병, 후자를 전라좌도 의병이라 하였다.
김천일의 의병 진영에 참여한 군사는 나주군 관내 출신이 주류를 이루었다. 광주 지역 고경명과 더불어 담양에서 유팽로(柳彭老)[?~1592] 및 양대박이 회동하여 전라좌도 의병의 조직이 구체화되었다. 5월 29일 담양에 의병 집결이 시작되었고, 6월 7일에 대군의 편성이 완료되었다.
화순 지역 의병의 서장을 연 사람은 문홍헌(文弘獻)[?~1593]이다. 고경명 등이 왜군과 대적할 때 능성현 출신 문홍헌은 동향(同鄕)의 구희(具喜)[1552~1593] 등과 함께 의병 300여 명을 모아 금산으로 올라갔다. 문홍헌 외에 화순 지역 출신 의병장 최경회의 조카 최홍재(崔弘載)[1560~1614] 역시 수백 명의 의병을 인솔하여 금산으로 북진하였다. 그러나 이들이 금산에 도착하기 직전에 고경명 부대가 패전하여 직접 전투에 참여하지 못하였다.
화순 지역의 의병들이 전투에 직접 참여한 것은 최경회가 전선에 뛰어든 이후였다. 최경회는 양응정(梁應鼎)[1519~1581]·기대승(奇大升)[1527~1572]에게 수학하였으며, 1561년(명종 16) 생원시에 합격하였고, 1567년(선조 즉위) 식년 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였다. 그 뒤 영해 군수 등을 지냈는데, 임진왜란 때는 상중(喪中)이라서 화순 지역에 머무르고 있었다.
최경회는 금산 전투의 패전 이후 문홍헌 등의 추대를 받아 의병 활동에 나섰고, 7월 24일 5,000여 명에 이르는 부대 편성을 완료했다. 최경회는 전부장에 송대창(宋大昌)[?~1593], 좌부장에 고득뢰(高得賚)[?~1592], 후부장에 허일(許鎰)[?~?], 우부장에 권극평(權克平)[?~?]을 임명하고, 문홍헌을 참모로 삼았다. 최경회는 전라우도 의병의 진용을 갖춘 후에 북상을 개시하여 금산·무주에서 전주·남원으로 향하는 일본군을 장수에서 막아 싸웠고, 금산에서 퇴각하는 적을 추격하여 우지치(牛旨峙)에서 크게 격파하였다. 이 싸움은 진주 승첩[제1차 진주 전투]에 큰 도움을 주었으며, 그 공로를 인정받아 1593년(선조 26) 4월 경상 우병사에 임명되었다.
1593년 6월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 등이 진주성을 다시 공격하자 창의사 김천일, 충청 병사 황진(黃進)[1550~1593], 복수 의병장(復讐義兵將) 고종후(高從厚)[1554~1593] 등과 함께 진주성 사수에 나섰다. 왜군의 진주성 공격을 앞두고 관군과 의병의 최고 지휘관의 합동 회의가 경상남도 함안군 부근에서 열렸다. 도원수 김명원(金命元)[1534~1602], 순찰사 권율(權慄)[1537~1599], 의병장 곽재우 (郭再祐)[1552~1617] 등은 항전을 피하자는 입장이었다. 반면 경상 우병사 최경회와 전라도 창의사 김천일, 충청 병사 황진은 사수를 주장하였다.
진주성의 고수 문제는 합의점을 찾지 못하고 독자적 판단에 맡겨졌다. 김명원과 권율 등은 운봉 지역으로 떠났고, 의병장 곽재우는 원성현을 거쳐 산음으로 향했다. 전라도 좌의병장 임계영(任啓英)[1528~1597]은 경상남도 사천 지역에서 호남으로 돌아갔고, 전라 병사 선거이(宣居怡)[1550~1598] 역시 병사들을 인솔하여 떠나갔다.
진주성에는 전라도 의병 약 3,000여 명, 진주목 내에 머물던 군사 1만 5000여 명을 비롯해 약 6~7만 명의 주민들이 있었다. 이들은 10만에 가까운 적을 맞이하여 10일 동안 처절한 혈투를 벌였다. 진주성의 군사는 왜군의 공략에 결사적으로 대응하였고, 왜군의 대규모 공세에 외부 지원 없이 저항하였다. 그러나 끈질기게 몰려드는 적을 적은 수로 막아내기에 어려움이 많았다. 전투가 발생한지 9일 만에 진주성은 함락되었고, 끝까지 저항하던 최경회를 비롯한 김천일·문홍헌 등은 촉석루까지 밀려났다. 최경회는 문홍헌이 호위하고, 김천일은 장자 김상건과 양산숙이 부지하고, 고종후는 오빈이 부조하여 북향에 재배한 뒤 남강에 투신하였다. 이종인(李宗仁)[?~1593], 강희열(姜熙悅)[?~1593], 오유(吳宥)[1544~1593], 이잠(李埁)[1581~?] 등 10여 명은 최후까지 싸우다가 전사하였다.
최경회와 함께 순절한 사람들은 현감 허일, 경정 권극평, 군수 고득뢰, 판관 송대창, 주부 김예수(金禮秀)[?~1593], 진사 문홍헌, 유학 구희(具喜)[1552~1593], 주부 최희립(崔希立)[1568~1593], 판관 노희상(盧希尙)[1563~1593], 생원 이영근, 부장 최억용, 유학 안기중, 수문장 노언경, 만호 오방한(吳邦翰), 유학 박혁기(朴爀紀), 유학 노자니, 주부 안기남, 선전 정봉수(鄭鳳壽)[1572~1645], 생원 정현보(鄭賢輔)[?~?], 무과 위정설, 유학 최개 등이었다.
[결과]
제2차 진주성 싸움에 참여한 전라 의병은 최경회의 휘하에서 싸운 화순 지역 의병이 주축을 이루고 있었다. 진주성의 함락은 화순 지역뿐만 아니라 임진왜란 최대의 비극이었다. 선조 때의 유성룡(柳成龍)[1542~1607]은 진주성 함락에 대하여 ‘적의 병력이 아군에 비해 강대하였고, 진주성 방어에 대한 서예원(徐禮元)[?~1593]의 착치가 적절하지 못했고, 명령 체계가 단일화되지 못하고 각 군이 분리되었으며, 제장(諸將)의 정세 판단 미숙에 따라 함안에서 분산된 점, 수성군에 대한 적의 외원로 차단으로 외곽 지원이 없었다는 점’을 그 원인으로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