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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시대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5600477
한자 朝鮮時代
분야 역사/전통 시대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지역 전라남도 화순군
시대 조선/조선
집필자 문안식

[정의]

1392년에서 1863년까지 전라남도 화순 지역의 역사.

[조선의 건국과 지방 행정 구역의 개편]

1392년 고려가 멸망하고 조선이 개창하였다. 각종 제도는 태조 이성계가 즉위 교서에서 “의장 법제는 모두 전조(前朝)의 고사에 따른다.”로 밝힌대로 고려 시대의 것을 그대로 계승하였다. 이에 대한 전면적인 개편이 이루어진 것은 1405년(태종 5) 무렵이었다.

우선 고려 때의 최고 정무 기관이었던 도평의사사(都評議使司)를 의정부(議政府)로 고쳤고, 첨의부를 폐지하여 의정부에 합했다. 또한 중추원을 폐지하고 군기에 관한 사항은 삼군 도총부와 병조에서 담당하였다. 삼사를 폐지하여 전곡 출납을 호조에서 맡았으며, 문하부와 낭사에서 맡고 있던 간쟁과 봉박의 임무를 사간원 및 사헌부에서 맡았다. 예문관은 제찬, 춘추관은 국사 기록을 맡았다. 승정원을 신설하여 왕명의 출납을 관장하였으며, 관리 임명 등은 이조와 병조에 귀속하였다.

지방 제도 역시 전면적인 개편이 이루어졌다. 고려의 행정 구획인 5도 양계를 대신하여 전국을 경기좌·우도를 비롯하여 충청도·전라도·경상도·강원도·풍해도 등 6도로 구분하고 북쪽 변경은 동북면과 서북면의 2면(面)으로 개편하였다. 6도에는 도관찰과 출척사를 파견하고, 동북면·서북면에는 도선무 순찰사를 파견하였다. 그 밑의 주(州)·부(府)·군(郡)·현(縣)에는 목사와 지군사 및 현령과 감무 등을 파견하였다.

조선 시대 화순 지역에서는 1394년(태조 3) 화순현에 속해 있던 남평현이 독립하면서 감무가 파견되었다. 1396년(태조 5)에는 화순현동복현의 감무가 겸임하였고, 1405년(태종 5)에는 동복현 감무를 화순현으로 옮겼다. 1407년(태종 7)에는 동복현화순현을 합해 복순현이라 하고, 1413년(태종 13)에 복순현화순현으로 고쳤다. 1416년(태종 16)에 화순현동복현을 다시 분리하여 동복현에 감무를 두었고, 화순현능성현에 합해 순성현이라 하였다. 1418년(태종 18)에 순성현을 다시 화순현능성현으로 분리하여 각각 현감을 파견하였다. 동복현 일대에 고려 말기에 존재했던 수촌현[현 화순군 북면 수리], 압곡현[현 화순군 북면 옥리], 대곡현[현 화순군 남면 대곡리], 보령현[현 화순군 이서면 영평리] 등의 자치 고을은 조선 초기에 모두 동복현으로 합병되었다. 화순현은 1435년(세종 17)에 이르러 능성현에 합해졌다가 다시 복구되었다.

[조선 전기의 호구와 주요 성씨]

화순 지역의 호구와 주요 성씨는 1473년에 간행된 『세종실록지리지(世宗實錄地理志)』를 통해 파악할 수 있다. 화순현의 인구는 209호 615명, 토성(土姓)은 배(裵)·최(崔)·오(吳)·윤(尹)·하(河) 였다. 외지로부터 옮겨와 살고 있던 성씨는 순천 박씨, 진주 김씨, 무진 김씨 등이 있었다.

능성현은 136호 763명, 토성은 구(具)·정(鄭)·문(文)·조(曺)·채(蔡)·주(周)였고, 외지에서 이주해 온 속성(俗姓)으로는 진주 강씨가 있었다. 동복현은 90호 289명, 토성은 오(吳)·성(成)·박(朴)·선(宣)·지(池), 속성은 김씨가 기록되어 있다.

[조선 전기의 주요 사건]

화순 지역은 기묘사화(己卯士禍)의 여파로 조광조(趙光祖)가 유배되어 오면서 유학 사상이 발전하고 유학자를 배출하는 등 큰 영향을 받았다. 화순 지역의 유학 발전에 직접 기여한 인물은 기묘사화로 동복 지역에 유배된 최산두(崔山斗)를 비롯하여 화순 지역 출신 양팽손(梁彭孫) 등을 들 수 있다. 선조 때에는 기축옥사(己丑獄死)가 일어나면서 조대중(曺大中)을 비롯하여 화순 지역의 많은 사람들이 화를 당하기도 하였다.

[조선 후기의 행정 구역 재편]

화순 지역의 행정 구역은 임진왜란 이후 호수와 인구가 대폭 감소하면서 변화가 일어났다. 화순현정유재란의 참화를 겪은 후 1597년(선조 30)에 현을 유지할 능력이 없다는 민원에 의하여 능성현에 속하게 되었으나, 1611년(광해군 3)에 이르러 능성현에서 다시 분리되어 복구되었다.

능성현은 1632년(인조 10)에 인조의 모후(母后)인 인헌 왕후 구씨[능성 구씨]의 관향(貫鄕)이라 하여 능주목으로 승격되었고, 이후 목사(牧使)가 부임하게 되었다. 1641년(인조 19)에는 능주 목사가 토포사를 겸하였고, 능주목은 1895년 행정 구역 개편 때까지 유지되었다.

한편 동복현은 1655년(효종 6)에 이르러 전패가 불타는 사건이 발생해 폐현되고 화순현에 합해졌다. 전패란 조선 시대 지방 객사에 전(殿)자를 새겨 세운 나무패를 말한다. 전패는 왕을 상징하였기 때문에 지방에 출장한 관원이나 수령 등이 배례하였다. 만일 이를 훼손하거나 모독하는 경우에는 국왕에 대한 불경으로 간주되어 본인과 수령 및 그 고을이 처벌을 받았다. 동복현은 1664년(현종 15)에 다시 화순현에서 독립하여 복설되었다.

[조선 후기의 호구]

1759년에 편찬된 『여지도서(輿地圖書)』를 보면 능주목의 호구와 인구는 각각 5,033호 1만 9650명이었다. 화순현은 1,715호에 5,777명이었고, 동복현은 2,106호에 7,393명이었다. 능주목의 호구와 인구는 화순현동복현을 합한 것보다 많았다.

[조선 후기의 학문과 사상의 발전]

화순 지역의 학문 활동과 관련하여 나경적(羅景積)[1690~1762]의 실학 연구를 들 수 있다. 나경적은 선기옥형[혼천의]·자명종·자용침·자전 수차 등의 천문 관측 기구와 생활 과학 기구 등을 발명하여 홍대용 등에 영향을 끼쳤다. 나경적 외에 하백원(河百源)[1781~1844] 역시 빼놓을 수 없는 실학자였다. 하백원은 지도 제작과 천문 역법을 연구하는 한편, 자명종 제작, 수차 설계 등 과학 기술 발전에 주목할 만한 업적을 이룬 호남을 대표하는 실학자였다.

[갑오개혁 이후의 행정 구역 편제]

조선 시대 화순 지역의 행정 구역은 나주목과 화순현동복현 체제가 1895년(고종 32) 23부제로 개편될 때까지 유지되었다. 갑오개혁 이후 8도를 대신하여 전국을 23부 및 331군(郡)으로 나누고, 각 부에 관찰사를 두었다. 23부는 한성·인천·충주·홍주·공주·전주·남원·나주·제주·진주·동래·대구·안동·강릉·춘천·개성·해주·평양·의주·강계·함흥·갑산·경성을 말한다.

오늘날의 전라남도 지역은 나주부를 중심으로 재편하였는데, 토지 면적과 호수 등을 고려하여 군(郡)의 등급을 정하였다. 화순 지역은 능주군이 3등군, 화순군과 동복군은 4등군이 되었다. 1908년에 이르러 화순군이 폐지되어 능주군[당시 17면]에 편입되었고, 1913년 능주군의 명칭을 화순군으로 고쳤다. 1914년 3월 1일 행정 구역 개편에 의해 동복군을 화순군에 편입하여 오늘날에 이르고 있다.

이용자 의견
고** 1913년 능주군의 명칭을 화순군으로 고쳤다.
위 사항은 근거가 없다. 다만 능주군과 동복군을 합하여 화순군으로 한 때는 1914년이다
2015.01.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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