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560049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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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錦山城戰鬪 |
분야 | 역사/전통 시대 |
유형 |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
지역 | 전라남도 화순군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문안식 |
[정의]
1592년 7월부터 8월 사이에 화순 지역 출신을 비롯한 의병이 참여하여 충청도 금산에서 왜군과 싸운 전투.
[개설]
금산성 전투는 고경명(高敬命)[1533~1592]과 조헌(趙憲)[1544~1592]이 지휘한 의병 부대 및 곽영(郭嶸)[?~?]이 지휘한 관군과 왜군 사이에 일어났다. 고경명 등이 왜군과 대적할 때 능성현 출신 문홍헌(文弘獻)은 동향의 구희(具喜)[1552~1593] 등과 함께 의병 300여 명을 모아 금산으로 올라갔다. 문홍헌 외에 화순 출신 의병장 최경회(崔慶會)[1532~1593]의 조카 최홍재(崔弘載)[1506~?] 역시 수백 명의 의병을 인솔하여 금산으로 북진하였다. 그러나 화순 지역 의병장들이 금산에 도착하기 직전에 고경명 부대가 패전하여 직접 전투에 참여하지는 못하였다.
[역사적 배경]
고경명은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전라도 광주 지역에서 의병을 일으켜 7,000여 명의 군사를 거느리고 한성을 향해 북상하였다. 고경명이 전주를 출발하여 여산에 이르렀을 때 왜군이 전라도로 침입해 들어올 것이라는 소식을 듣게 되었다. 이에 고경명은 계획을 바꾸어 왜군을 물리친 후 북상하기로 결정하였다.
전라도 방어사 곽영은 금산 서쪽 진산에 진을 치고 있었다. 왜군은 이치 전투에서 권율(權慄)[1537~1599]이 이끈 조선군에게 패한 후 1만 5000여 명의 병력이 금산에 주둔하고 있었다. 고경명의 의병은 곽영의 관군과 함께 금산성을 포위하고 공격하여 양군 사이에는 1592년 7월 9일과 10일에 걸쳐 치열한 전투가 벌어지게 되었다.
[경과]
고경명의 의병과 곽영의 관군이 공격을 하자 왜군은 성 위에서 조총 사격으로 접근을 저지하였다. 고경명이 금산성 서문을 공격 목표로 잡고 의병의 주력을 서문 공격에 투입하였을 때 왜군의 집중 공격을 받은 관군이 무너지기 시작하였다. 이에 의병들도 동요하기 시작하였다. 고경명은 끝까지 군대를 독려하다가 전사하였고, 많은 의병과 관군도 희생을 당하였다.
그러나 문홍헌과 최홍재가 이끄는 화순의 의병 부대는 직접 전투에 참여하지 못하였다. 문홍헌이 금산에 도착했을 때 고경명은 군량이 부족하니 양곡을 모아 오라고 부탁하였다. 문홍헌은 모속관의 임무를 띠고 화순으로 내려와 활동하다가 고경명의 전사 소식을 들었다. 최홍재의 의병 부대 역시 고경명의 의병 부대가 패전한 소식을 듣고 회군하였다.
[결과]
금산성 전투는 관군과 의병의 연합 작전 실패로 패배하였다. 그러나 왜군의 전주 지역 진출을 저지하는 데 적지 않게 기여하였다. 화순 출신의 의병 부대 역시 직접 전투에 참여하지 못하였지만, 최경회가 고경명 휘하의 흩어진 군사 800여 명을 모아 전라 우의병을 조직하면서 의병의 구심체로 떠올랐다. 전라 우의병에는 고경명 휘하의 담양 회맹에 참여했던 인사들이 많았지만, 최경회 일가와 문홍헌 등 화순 지역 출신들이 적지 않게 참여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