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560048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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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己丑士禍 |
분야 | 역사/전통 시대 |
유형 |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
지역 | 전라남도 화순군 |
시대 | 조선/조선 전기 |
집필자 | 문안식 |
발생|시작 시기/일시 | 1589년 - 기축사화 발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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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격 | 사화 |
관련 인물/단체 | 조대중 |
[정의]
1589년(선조 22)에 정여립(鄭汝立)[1546~1589]을 비롯한 동인의 인물들이 모반 혐의로 박해를 받고, 전라남도 화순 지역의 조대중(曺大中) 등이 화를 입은 사건.
[개설]
기축사화(己丑士禍)는 1589년(선조 22) 정여립이 반란을 꾀하고 있다는 고변(告變)에서 시작되어 1591년까지 수많은 동인의 인물들이 연루되어 희생되었다. 이를 통해 동인과 서인의 대립과 갈등의 골이 크게 깊어지는 계기가 되었다.
[역사적 배경]
기축사화의 발단은 황해도 관찰사 한준(韓準)[1542~1601]과 재령 군수 박충간(朴忠侃)[?~1601], 안악 군수 이축(李軸)[1538~1614], 신천 군수 한응인(韓應寅)[1544~1614] 등이 정여립의 역모를 고변함으로써 시작되었다. 조정에서는 선전관과 의금부 도사를 황해도와 전라도에 파견하여 사실을 확인하도록 하였다.
정여립은 황해도 안악군에 사는 변숭복(邊崇福)[?~1589]을 통해 그의 제자였던 안악 교생 조구(趙球)가 자복했다는 말을 전해 듣는다. 이에 아들 정옥남(鄭玉男)[?~1589]과 함께 도망가 진안 지역에 숨어 있다가 자결한다. 반면 정옥남은 잡혀 문초를 받은 끝에 길삼봉(吉三峯)[?~?]이 모의 주모자이고, 해서 사람 김세겸(金世謙)·박연령(朴延齡)·이기(李箕)[1476~1552]·이광수(李光秀)·변숭복 등이 공모했다고 자백하였다. 이들은 서울로 압송되어 심문을 받으면서 일부는 조구와 같은 내용을 자백하였고, 불복하다가 장살을 당하기도 하였다. 정여립의 자결과 일부 연루자의 자백에 의해 역모 고변은 사실로 단정되었다.
[경과]
서인의 정철(鄭澈)[1536~1593]이 옥사를 엄하게 다스려서 이발(李潑)[1544~1589]·이길(李洁)[1547~1589]·김우옹(金宇顒)[1540~1603]·백유양(白惟讓)[1530~1589]·정언신(鄭彦信)[1527~1591] 등 동인의 지도자급 인물들이 처형 또는 유배당했다. 이발은 정여립의 집에서 자신이 보낸 편지가 발각되어 다시 불려가 고문을 받다가 죽었으며, 형제와 노모 및 자식까지도 모두 죽임을 당하였다.
같은 해 12월에는 화순군 동복 지역의 유생 정암수(丁巖壽)[?~?]를 비롯한 50여 명이 상소하여 동인 고관과 호남 지방의 사류(士類)가 다수 연좌되기에 이르렀다. 화순군에서는 조대중(曺大中)[1549~1589] 일가가 피화의 대상이 되었다. 선조의 명에 의해 사화가 확대되어 동인으로 지목된 30여 명과 나사침(羅士忱)[1526~1596]·나덕명(羅德明)[1551~1610] 부자, 조대중 일가, 이발 형제 등이 처형되거나 유배되는 등 혹심한 피해를 입었다. 또한 진주 지역에 거주하던 처사 최영경(崔永慶)[1529~1590]은 모반의 주역인 길삼봉으로 지목되어 옥사하였다.
[결과]
기축사화로 인해 정여립과 친교가 있었거나 동인이라는 이유로 처형된 자가 무려 1,000여 명에 이르렀다. 이후 전라도는 ‘반역향’으로 불리게 되었고, 호남 지역 사족 사이의 반목과 대립이 후대까지 이어져 여러 가지 문제를 낳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