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560091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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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曺大中 |
이칭/별칭 | 화우(和宇),정곡(鼎谷)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문무 관인 |
지역 | 전라남도 화순군 |
시대 | 조선/조선 전기 |
집필자 | 권수용 |
출생 시기/일시 | 1549년 - 조대중 출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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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동 시기/일시 | 1576년 - 조대중 진사시 급제 |
활동 시기/일시 | 1582년 - 조대중 문과 급제 |
활동 시기/일시 | 1589년 - 조대중 전라도 도사 제수 |
활동 시기/일시 | 1589년 - 조대중 정여립 사건에 연루되어 국문 당함 |
몰년 시기/일시 | 1590년 - 조대중 사망 |
출생지 | 녹구리 - 전라남도 화순군 화순읍 삼천리 4리 |
묘소|단소 | 지곡(智谷) - 전라남도 화순군 화순읍 다지리 |
사당|배향지 | 지곡 서원 - 전라남도 화순군 화순읍 다지리 |
성격 | 문신 |
성별 | 남 |
본관 | 창녕(昌寧) |
대표 관직 | 전라도 도사 |
[정의]
조선 전기 화순 출신의 문신.
[개설]
문과에 급제하여 전도가 유망하였는데, 전라도 도사(全羅道都事)를 역임하던 중 정여립 사건에 연루되어 장살(杖殺 ) 당하였다.
[가계]
본관은 창녕(昌寧). 자는 화우(和宇), 호는 정곡(鼎谷). 옥천군(玉川君) 조흡(曺恰)과 화순 입향조인 조온(曺穩)의 후손으로, 할아버지는 조건(曺健)이며, 아버지는 조세명(曺世明)이고, 어머니는 나주인(羅州人) 정도(鄭覩)의 딸이다. 경주인(慶州人) 김응성(金應星)의 딸과 혼인하였다.
[활동 사항]
조대중(曺大中)[1549~1590]은 이황(李滉)의 문인으로 1576년(선조 9) 진사시에 합격하였고, 1582년 식년 문과(式年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하여 한림(翰林), 응교(應敎), 성균관, 예문관 등의 벼슬을 역임하였다.
1589년에 전라도 도사로써 지방을 순시하다가 보성(寶城)에 이르러 부안(扶安)에서 데려온 관기(官妓)와 헤어지며 석별(惜別)의 눈물을 흘렸다. 이것이 잘못 전해져 때마침 반란을 꾀하다 죽은 정여립(鄭汝立)의 추형(追刑)을 슬퍼한 것이라 하여 정여립의 일파로 몰려 국문(鞫問)을 받다가 이듬해 장살(杖殺)되었다. 국문을 받던 중 읊은 시가 ‘난언(亂言)’이라 하여 죽은 뒤 추형(追刑)을 당하였다.
바야흐로 환난에 걸렸을 때, 추포(追捕) 황공신(黃公愼)은 사간원 정언(正言)으로서 흉악한 글과는 만에 하나도 이치에 가깝지 아니함을 말하였고, 백사(白沙) 이항복(李恒福)도 이 일을 듣고 문득 원통하게 죽었다고 하였다. 조대중의 상여가 남으로 돌아올 때 이순신(李舜臣)도 그때 정읍 군수로 있었는데 글을 지어 제사를 지냈으며, 우계(牛溪) 성혼(成渾)도 옥사를 담당한 사람에게 글을 보내 어찌 죄와 벌을 고르게 하지 못하느냐고 꾸짖었다.
일찍부터 유희춘(柳希春)을 좇아 의리를 강론하고 분석함이 심히 밝으니 사람들이 이를 칭찬하였다. 또한 퇴계(退溪) 이황(李滉)을 좇아 안자(顔子)의 극기복례(克己復禮)와 주렴계(周濂溪)의 태극도설을 논할 때도 분석함이 막힘이 없으니 퇴계가 깊이 칭찬하였다 한다.
[학문과 저술]
유집에 『정곡유고(鼎谷遺稿)』가 있다.
[묘소]
묘는 화순군 화순읍 다지리 지곡(智谷)에 있다.
[상훈과 추모]
인조반정이 성공한 뒤에 선비들의 상소로 인하여 대신들이 의논하고, 신원하여 벼슬을 회복하고 제사를 지냈으며, 역정사(櫟亭祠)[화순군 화순읍 다지리]에 배향하였다. 역정사는 도중에 없어지고 현재 지곡 서원(芝谷書院)으로 새롭게 바뀌었으며, 조흡(曺恰), 조대중(曺大中), 조수성(曺守誠), 조수홍(曺守弘), 조엽(曺熀) 5위를 배향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