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560106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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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崔慶會 |
이칭/별칭 | 선우(善遇),삼계(三溪),일휴당(日休堂)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의병·독립운동가 |
지역 | 전라남도 화순군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김만호 |
출생 시기/일시 | 1532년 - 최경회 출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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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학 시기/일시 | 1548년 - 최경회 양응정의 문하에서 수학 |
수학 시기/일시 | 1557년 - 최경회 기대승의 문하에서 수학 |
활동 시기/일시 | 1567년 - 최경회 문과 급제 |
활동 시기/일시 | 1592년 - 최경회 의병 활동 |
몰년 시기/일시 | 1593년 - 최경회 사망 |
출생지 | 최경회 출생지 - 전라남도 화순군 화순읍 삼천리 |
성격 | 의병 |
성별 | 남 |
대표 경력 | 임진왜란 때 의병 활동 |
[정의]
조선 후기 화순 출신의 문신이자 의병.
[가계]
본관은 해주(海州). 자는 선우(善遇), 호는 삼계(三溪)·일휴당(日休堂). 고려 문헌공(文憲公) 최충(崔沖)의 16세손이고, 최혼(崔渾)의 증손이다. 할아버지는 증 승지(承旨)인 최윤범(崔尹範)이고 아버지는 증 영의정 최천부(崔天符)이며 부인은 나주 김씨 김원(金遠)의 딸이다.
[활동 사항]
최경회(崔慶會)[1532~1593]는 1548년(명종 3) 양응정(楊應鼎)의 문하에서 수학하였고, 1557년 광주(光州)의 고봉(高峯) 기대승(奇大升)을 찾아가 사사(師事)하였다. 1561년(명종 16년)에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하였고, 1567년(명종 22)에 문과(文科) 을과(乙科)에 급제하였다. 그후 사암(思菴) 박순(朴淳)의 천거에 의해 다양한 관직을 맡았다.
1574년(선조 7)에 성균관 전적, 사헌부 감찰, 형조 좌랑을 거쳐 옥구 현감(沃溝縣監)을 역임하였고, 이어 장수 현감(長水縣監), 무장 현감(茂長縣監), 영암 군수(靈岩郡守)를 지냈다. 1584년(선조 17)에는 다시 호조 정랑, 형조, 영해 부사(寧海府使)를 역임하였고, 이어 사도시정(司導寺正), 담양 부사(潭陽府使)를 지내던 중 1590년(선조 23) 어머니 상을 당하여 사직하고 화순으로 귀가 하였다.
1592년(선조 25)에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김천일(金千鎰)과 고경명(高敬命)이 처음 의병을 일으킬 당시에 최경회에도 권하였으나 이때에는 상중(喪中)이었기 때문에 큰형 최경운(崔慶雲), 작은 형 최경장(崔慶長)을 도와 화순읍 삼천리에 의병청을 설치하는 것을 도왔다. 또 의병 5백여 명을 모아 조카인 최홍재(崔弘宰)에게 인솔하여 고경명(高敬命)의 막하에 가도록 하였다. 하지만 고경명이 금산성 전투에서 사망했다는 소식과 이광(李洸)의 관군이 용인(龍仁)에서 패했다는 소식을 접한 이후 직접 거병할 뜻을 세웠다. 이때 화순군 능주 출신 진사(進士) 문홍헌(文弘獻)이 고경명 휘하의 병력을 수습하여 돌아왔는데, 그의 요청에 응하여 의병장(義兵將)이 되었다. 1592년 7월 26일 부대 편성을 마쳤는데, ‘골(鶻)’자(字)로 부대기를 삼고 우의병(右義兵)을 칭했다.
최경회는 전라 우의병을 이끌고 남원(南原)에 도착하여 임계영(任啓英)이 이끄는 전라 좌의병과 합류하였다. 이윽고 금산(錦山), 무주(茂朱)의 싸움에서 많은 공을 세웠다. 최경회는 일본군과의 전투 중에 적장(賊將)의 언월도(偃月刀)와 「청산백운도(靑山白雲圖)」를 빼앗았다고 한다. 이 언월도는 모리미찌[盛道]가 제작한 자웅검(雌雄劍) 중의 하나라고 하고, 「청산백운도」는 고려 공민왕(恭愍王)이 그리고 안평 대군(安平大君)의 글씨와 목은(牧隱) 이색(李穡)의 시가 있다고 전해지는 그림이다.
이어 10월에는 제1차 진주성 전투 때 외부에서 협조하였고, 이후에는 김면(金沔)의 군대와 연합하여 개령(開寧) 지역을 수복하였다. 이러한 공(功)이 인정되어 1593년(선조 26) 초에 경상 우도(慶尙右道) 병마절도사(兵馬節度使)의 직함과 인(印)이 내려졌다.
이후 1593년 6월 중순에 진주성(晉州城)에 입성하여 의병장 김천일(金千鎰), 충청 병사(忠淸兵使) 황진(黃進), 복수 의병장(復讐義兵將) 고종후(高從厚) 등과 함께 성을 지켰다. 제2차 진주성 전투가 시작되어 9일 동안 일본군의 본격적인 공격을 막았으나 역부족이었다. 적장에게 빼앗은 언월도와 「청산백운도」를 조카 최홍우(崔弘宇)에게 맡겨 성을 나가도록 했다. 최경회는 건재(健齋) 김천일(金千鎰), 준봉(隼峰) 고종후(高從厚) 등과 더불어 촉석루(矗石樓)에 올라 죽기로 맹세하고, 임금이 있는 북쪽으로 두 번 절하고 남강(南江)에 몸을 던져 순국하였다.
[저술 및 작품]
유고(遺稿)로는 『일휴당집(日休堂集)』이 있다.
[묘소]
1833년(순조 33)에는 화순군 한천면 금전리에 부조묘(不祧廟)를 세웠다. 찬성(贊成) 권적(權摘)이 시장(諡狀)을, 판서(判書) 유최기(兪最基)가 묘표(墓表)를 쓰고 면암(勉庵) 최익현(崔益鉉)이 묘지(墓誌)를, 연재(淵齋) 송병선(宋秉璿)이 신도비문(神道碑文)을 지었다. 이후 저수지 공사로 수몰될 위기에 처하자 1963년 3월에 현재의 자리인 화순읍 다지리로 옮겼다. 2003년에 중건하였다.
[상훈과 추모]
1593년(선조 26) 8월 7일 이조 판서(吏曹判書)를 추증하고 진주의 창열사(彰烈祠)에 사액하였으며 공신의 녹권을 내렸다. 1627년(인조 5)에는 좌찬성(左贊成)을 증하고, 능주 한천면 모산리에 포충사(褒忠祠)를 세웠다. 1685년(숙종 11)에는 능주 향교 유림들이 능주면 잠정리에 화순 능주 삼충각(三忠閣)을 지어 최경회(崔慶會)·문홍헌(文弘獻)·조현(曺顯) 등 충신 3인의 충공을 기념하였다. 1746년(영조 22)에는 진주(晉州)의 관동(官僮)인 황귀동(黃貴童)이 남강(南江)에서 최경회가 안고 투신한 인(印)을 얻었는데, 진주 목사(晉州牧使)가 장계를 올리자 영조가 친히 인명(印銘)을 짓고 동갑(銅匣)을 주조하여 내려주었으며 인각(印閣)을 세워 보관하도록 했다. 1753년(영조 29)에는 조정에서 충의(忠毅)라는 시호를 내려 주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