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560092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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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梁彭孫 |
이칭/별칭 | 대춘(大春),학포(學圃),혜강(惠康)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문무 관인 |
지역 | 전라남도 화순군 |
시대 | 조선/조선 전기 |
집필자 | 권수용 |
출생 시기/일시 | 1488년 - 양팽손 출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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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동 시기/일시 | 1510년 - 양팽손 생원시 급제 |
활동 시기/일시 | 1516년 - 양팽손 문과 급제 |
활동 시기/일시 | 1519년 - 양팽손 기묘사화 때 귀향 |
활동 시기/일시 | 1539년 - 양팽손 관직 제수, 사양 |
활동 시기/일시 | 1544년 - 양팽손 용담 현령 부임, 사임 |
몰년 시기/일시 | 1545년 - 양팽손 사망 |
추모 시기/일시 | 1630년 - 양팽손 죽수 서원 배향 |
추모 시기/일시 | 1818년 - 양팽손 용강 서원 배향 |
거주|이주지 | 학포당 - 전라남도 화순군 이양면 쌍봉길 74-3[쌍봉리 411] |
사당|배향지 | 죽수 서원 - 전라남도 화순군 한천면 학포로 1786-45[모산리 산 15-3] |
사당|배향지 | 용강 서원 - 전라남도 순천시 금곡동 285번지 |
성격 | 문신 |
성별 | 남 |
본관 | 제주(濟州) |
대표 관직 | 교리|이조 참판 |
[정의]
조선 전기 화순 출신의 문신.
[가계]
본관은 제주(濟州). 자는 대춘(大春), 호는 학포(學圃). 직장 양사위(梁思渭)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양담(梁湛)이고, 아버지는 양이하(梁以河)이며, 어머니는 해주인(海州人) 최혼(崔渾)의 딸이다. 시호는 혜강(惠康)이다.
[활동 사항]
양팽손(梁彭孫)[1488~1545]은 송흠(宋欽)의 문인으로, 어려서부터 영특하여 신동이라고 불렸는데, 송흠은 우리나라의 도를 전할 책임자라고 칭찬하였다. 송순(宋純)·나세찬(羅世贊) 등과 동문으로써 학문을 연마하였으며, 항상 『소학』, 『근사록』 등으로 처신의 지침을 삼았고, 당시 신진 사류의 한 사람으로 활약하였다. 회화에도 일가견을 보여 안견(安堅)의 산수화풍을 계승하였다. 1510년(중종 5)에 조광조(趙光祖)와 함께 생원시(生員試)에 합격했으며, 1516년(중종 11)에 식년문과에 갑과(甲科) 3위로 합격하였다. 현량과에 발탁되고, 정언과 수찬, 교리를 지냈고, 호당에 뽑혀 사가독서를 하였다. 정언(正言)으로 재직할 때 이성언(李誠言)을 탄핵한 일로 인해 대신들의 의계(議啓)로써 직책이 갈렸지만, 조광조와 김정(金淨) 등 신진사류들로부터는 언론을 보호한 인물로 평가받기도 하였다. 1519년 교리(校理)로 재직 중 기묘사화로 조광조 등이 처벌될 때 홍문관 동료들을 이끌고 극간(極諫)하다가 삭직당했다. 벼슬을 그만두고 향리로 귀향하여 조광조와 날마다 상종하였다. 쌍봉리의 시내가에 학포당(學圃堂)을 짓고 「춘산계은사(春山溪隱辭)」, 「오류선생찬(五柳先生贊)」, 「제협서율부(除挾書律賦)」를 저술하였으며, 기준(奇遵)·박세희(朴世熹)·최산두(崔山斗) 등의 기묘명현들과 경론을 강론하니 세상에서 ‘사학사’라고 칭하였다. 조광조가 사약을 받고 죽었을 때에는 시신을 수습하여 묻어주었다. 1539년에 다시 관직을 제수받았으나 사양하고 취임하지 않았다. 그러다가 1544년 김안로(金安老)의 사사 후 용담현령(龍潭縣令)에 잠시 부임했다가 곧 사임하고 이듬해에 죽었다.
[학문과 저술]
작품으로는 「산수도」 1점이 전하며, 「춘산계은사(春山溪隱辭)」, 「오류 선생찬(五柳先生贊)」, 「제협서율부(除挾書律賦)」 등을 저술하였고, 문집으로 『학포유집』 2책이 전한다.
[상훈과 추모]
선조 때 이조 참판(吏曹參判)에 증직되었고, 1630년(인조 8)에 김장생(金長生) 등의 청으로 능주의 죽수 서원(竹樹書院)에 배향되었으며, 1818년(순조 18)에 순천의 용강 서원(龍岡書院)에 추향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