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56C01020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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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야 | 종교/유교 |
유형 | 마을/마을 이야기 |
지역 | 전라남도 화순군 도암면 도장리 도장 마을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이옥희 |
조선/조선 전기 | 1446년 - 형광호 집에 형군철이 무과에 급제하여 받은 교지가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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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조선 전기 | 1519년 - 형세영이 도장 마을 매산등으로 입향하였다. |
조선/조선 후기 | 1632년 - 김철완이 도장 마을 매산등으로 입향하였다. |
조선/조선 후기 | 1642년 - 진주 형씨 형군철이 문과에 급제하였다. |
개항기 | 1902년 - 형학문이 교지를 받았다. |
마을지 | 매산등 - 전라남도 화순군 도암면 도장리 매산등 |
[도장 마을에서 20대를 살고 있는 진주 형씨 가문]
도장 마을 아내미길에는 진주 형씨 20대 종손인 형광호 씨 집이 자리하고 있다. 오랜 세월동안 도장 마을을 지켜온 진주 형씨 가문이 이곳에 자리를 잡게 된 내력이 후손들의 이야기와 족보를 통해 전해지고 있다.
지금으로부터 500년 전, 조선 중종 때인 1519년경의 일이다. 진주 형씨 형세영(邢世英[1507~1581]이 기묘사화의 변을 피하여 나주 남평 우산리 골모리를 거쳐 도장리 인근인 매산등(梅山嶝)으로 입향하였다고 한다. 형세영이 기묘사화의 변을 피해 이곳에 자리를 잡게 되었음은 그가 기묘사화의 핵심인물인 조광조(趙光祖), 벗인 양팽손(梁彭孫) 등과 교유하였다는 사실에서 그 관련성이 확인된다. 그의 행적을 적은 진주 형씨 족보 「도곡공행적(道谷公行蹟)」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공의 호는 도곡인데 군철의 5세손이고 자홍의 아들이다. 성품이 인자하고 효성스러운데다 뜻도 청렴결백하였다. 일찍이 문장으로 명성을 떨쳤고 만년에는 덕을 닦았다. 종족들과는 화목하게 지내고 고장에서는 신실하였다. 정암 조광조, 학포 양팽손과 같이 성리학을 강론하면서 세상의 일에 얽매이지 않고 자연에 머무르며 학문하는 것을 즐거움으로 삼았다. 유림들의 천거로 경릉 참봉에 발탁되었으나 사양하고 나아가지 않았다. 중종 때 호조참판의 직을 내렸다.’「도곡공행적」
형세영이 이곳 깊은 산골에 자리를 잡은 것은 처사로서의 삶을 선택한 은거의 성격이 강했음을 유추할 수 있는 기록이다.
형세영이 매산등에 터를 잡은 후 그곳에서 5대를 살았다. 그 후 빈대로 인한 피해가 심하여 현재의 터로 자리를 옮겼다고 한다. 이 터에 집을 짓고 산 것도 어느덧 15대째이다. 현재 가옥의 모습은 슬라브 양옥집이지만 전에는 본채, 행랑채, 사당 등 격식을 갖춘 집이었다. 집을 받치고 있는 기둥도 크고 대청도 넓어서 마을 회의를 이 집에서 다 할 정도였다. 그런데 해가 갈수록 집이 낡고 매년 이엉을 새로 얹는 것이 번거로워 20여 년 전 양옥집으로 바꾸게 되었다. 형광호 종손과 유흥자 종부는 지금의 양옥집이 예전보다 살림하는 것은 편하다고 하면서도 옛집을 없애버린 것을 두고두고 아쉬워하고 있다. 그래서 다른 건물은 다시 세우지 못하더라도 사당 만큼은 다시 지을 계획이라고 하였다. 한 집터에서 15대가 나는 것은 매우 드문 일이라 사람들은 한결같이 이 집터를 좋은 집터라고 말한다.
[진주 형씨 가문과 진주 김씨 가문의 만남]
도장 마을에 처음 입향한 성씨는 진주 형씨이지만 나중에 들어온 진주 김씨 역시 번성하여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진주 김씨가 도장 마을에 깃들게 된 흥미로운 사연이 전하고 있다.
1636년경 나주 왕곡 신포리에 거주하던 진주 김씨 김철완(金鐵完)[1606~?]이 병자호란 중에 산골로 피난을 가는 길이었다. 도중에 날이 어두워 진주 형씨 댁에서 하룻밤을 묵어가게 되었다. 그곳에서 하룻밤을 묵는 동안 김철완이 예사롭지 않은 인물임을 알아 본 진주 형씨 집안에서는 피난길을 접고 이 마을에 머물 것을 권유한다. 그리고 얼마 후 진주 형씨 가문의 딸을 김철완과 혼인시킨다.
지혜로운 눈빛과 겸손한 몸가짐, 얼굴에서 빛이 나는 한 청년이 피난길에 우연히 대가집에 머물게 된다. 마침 그 집에는 혼기가 찬 꽃다운 딸이 있다. 청년과 몇 마디 대화를 나누던 대가집 주인은 청년의 비범함을 알아보고 그 집에 머물며 집안일을 돕게 한다. 청년이 집안일을 돕는 동안 창호지 문틈으로 그를 보게 된 진주 형씨 처녀는 왠지 모르게 가슴이 뛴다. 이렇게 시작하는 진주 김씨 김철완과 그의 처 진주 형씨의 러브스토리는 영화나 소설에 등장할 법한 이야기이다.
진주 김씨는 도장 마을에서 진주 형씨의 외손으로 시작했지만 번성하여 후에 큰 인물들을 많이 배출했고 어느덧 14대가 살아오고 있다.
진주 김씨 14대 손인 김기화 씨 댁은 아내미길에 있는 도장 마을 경로당 위쪽에 자리 잡고 있다. 하지만 처음부터 이곳에 터를 잡은 것은 아니라고 한다. 진주 김씨가 시거한 곳은 밧도장굴이었다. 지금은 대나무로 우거져 있어 주거지로서의 모습을 찾기는 쉽지 않지만 예전에는 이곳까지 마을이 형성되어 있었다. 그런데 일제 강점기와 6·25 전쟁을 거치면서 마을 아래쪽으로 옮기게 되면서 터전이 바뀌게 된 것이라고 한다.
도장 마을은 진주 형씨 가문과 진주 김씨 가문의 결합으로 큰 마을이 되었으며 두 성씨가 큰 분쟁 없이 지금까지 서로 협력적인 관계를 유지해오고 있다.
[정보제공]